2014.10.11 08:14

에이미 멀린스(Aimee Mullins): 역경의 기회

에이미 멀린스의 TED speech는 '역경'과 '장애'에 관한 이해의 관점을 결정하는 언어(정의)와 사회적으로 고정된 인식의 한계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역경'과 '장애'에 관한 관점의 변혁이 이 speech의 핵심이다. 스캇 펙 (M. Scott Peck)은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문제상황에 대하여 현실회피적 태도를 버릴 것을 충고하고 있다. 인간에게 문제상황이 안겨주는 고통을 회피하고 싶은 심리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면이지만, '현실회피' 또는 '문제무시'는 삶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다. 에이미 멀린스는 '역경'에 대하여 역경을 극복의 대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와 함께 춤출 것을 제안하고 있다. 스캇 펙은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생과 성장을 선택하라. 그것은 변화와 죽음의 가능성을 함께 선택한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피해서 떠나가면 또 항상 변화하는 삶의 본질을 외면해 버린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삶으로부터 피해가게 되는 것이다."


(아래의 에이미 멀린스의 speech에는 다윗의 '진화론'과 신에 관하여 언급되고 있는데, 일단 여기에서 다윗의 ‘진화론’은 ‘인간의 변화에 대하여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활용하는 예로 이해하는 한도에서는 신앙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수용할 수 있는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열정에 기름붓기“ 블로그>



<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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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9 23:0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 (김형국 목사)

<아프고도아름다운 그것> 말씀 시리즈     설교_김형국 목사

05월 17일_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소속
06월 07일_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
06월 14일_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부르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

 

 

서론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 상처를 주게 됩니다. 저는 제가 잘 아는 분이 교회에 와 계셔서 친절하게 인사하러 다가갈 때, 상대분이 시큰둥하게 대하면 상처를 받게 됩니다. 또한 대표 목사인 제가 형제나 자매들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면 또 상처를 받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가정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닮은 사랑을 주고 받는 법을 배우고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100 가정 중에 5% 정도는 배우자간의 호환성이 뛰어나서 거의 싸우지 않습니다. 너무 행복한 가정입니다. 제 친구 중에 그러한 가정을 꾸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 친구의 아들은 어느 날 부모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엄마 같은 여자를 고를 수 있는 아버지 같은 남자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정의 현실은 그와 같이 못합니다. ‘나는 엄마처럼 또는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인간은 친밀한 관계를 소망합니다. 친밀한 관계란 편하고 자연스럽게 방어기제 없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1.     우리의 갈망과 악순환의 고리

 

가)   우리의 갈망: 친밀함



소속감 

+      소통 

 =          친밀감 

 단체에 대한 소속은 자신의 정체감에 영향을 줍니다

나의 말이 전달되고 서로 '들려지는 관계' 

 

 

 

나)   우리의 현실

 

소속감이 깊고 소통이 잘 되면 친밀감이 높아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소속감도 낮고, 소통도 잘 되지 않아서 친밀감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마음에 분노가 쌓이게 됩니다. 이 분노가 마음에 쌓인 사람,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을 가치 없다고 비하할 뿐 아니라 힘없는 아이 또는 아내에게 분노를 터뜨립니다.

 

내가 있는 그대로 편하게 받아들여지는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이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따뜻한 관계에 대한 갈망은 있지만, 감추고 부인하며 상처받는 것을 피하고 싶어서 마음에 벽을 세우고 그 뒤에 숨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한 남편의 고백이 있습니다. 항상 아내에게 잘 해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을 때에, TV만 보고 있는 아내를 보면 마음에 벽이 생긴다고 합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데라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많은 아내와 아이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아이들도 자신이 기독교인으로서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막상 엄마의 잔소리에 상처받고 원하지 않는 말을 하게 되고 문닫고 방에 들어가버립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됩니다. 나들목 교회의 경우도 이 교회가 건강하고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고 와서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상처받는 분들도 계십니다. 완전함을 추구하는 나들목교회가 완전하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다들 겉으로는 정상 같지만 내면에 다들 문제가 있는 분들이 모여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다)   악순환의 고리

 

위와 같이 친밀함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소통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속감도 갖기 힘들며 그 결과로 다시 친밀감은 더 낮아지고 마는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2.     채워지지 않는 갈망, 악순환의 이유

 

가)   일차적인 이유


어릴 때의 경험이 커서 인간관계를 맺고 정서적으로 느끼는 영역에 모두 영향을 끼치는 것이 맞습니다. 어린 시절에 신체적 또는 정서적으로 친밀감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관계를 맺는 법을 잘 모릅니다. 따라서 어렸을 적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관계 속에서 내가 다른 사람을 수용하는 경험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한 자매의 문제는 잘못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잘못을 인정하면 약자이고 매를 맞았던 경험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익히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   근원적인 이유  3:10~18

 

이 구절은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시작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11) 이고 끝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18)입니다. 이것은 문제의 원인을 강조하고자 하는 시적 표현인데,‘죄성을 의미합니다 자기중심주의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또는 나의 필요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원하는 바를 취하는 죄성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에, 독한 말과 독한 행동 (13, 14)이 나오게 되고 그것은 폭력으로 이어지며 (15, 16) 그 결과로 평화가 실종됩니다 (17)

 

다)   하나님의 근원적 해결방법

 

• 하나님의 사랑 (요일 3:16)

이 구절에 따르면 사랑을 알게 된 계기가 바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이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뇌의 화학작용입니까? 그것은 사랑의 느낌일 뿐입니다. 사랑의 원형은 하나님입니다.

• 하나님의 자기부인 ( 2:5~8)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부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단순하게 목사로 또는 갈릴리 촌구석에 내려오신 정도로 낮아지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불의한 재판으로 죽기까지 낮아지셨던 것입니다. 자기부인은 마땅히 자신이 주장할만한 것을 포기하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바로 자기부인 없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기대 ( 13:34)

하나님은 사랑의 모델로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기대는 바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8:34) 예수를 따르는 것은 결국 사랑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 대전제는 자기부인이요 자기포기입니다.

 

 

3.     다시 아름다워지는 관계를 향하여

 

가)   사랑의 점화를 경험하라

 

이것은 고통스러운 주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기근으로 시달려 마른 아이에게는 좋은 음식은 소화하지 못해서 소용이 없습니다. 죽과 미네랄을 섞어 먹게 해서 소화할 수 있는 기초체력을 길러줘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참된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 고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나)   사랑의 영성을 키우라: 그 본질은 자기 부인의 영성

 

사랑하고 싶어서 하는 사랑은 초보적인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기 힘들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지만 결단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고 싶지 않은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위선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본능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입니다.

 

결혼의 적절한 시기도, 로맨틱한 사랑에 빠져있을 때에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문제점과 한계를 이해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겠다고 결단할 때에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이고, 이러한 때가 바로 결혼할 때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부인을 위한 올바른 태도는 바로 자기 착오(오류)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갈등이 존재하는 이유는 내가 맞다고 생각해서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정죄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이 때에는 상대방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하나님께서 내가 옳지 않다고 하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그러한 태도이고, 그러면 상대방의 주장이 더 잘 들립니다. 희생하며 섬기는 때에도 자기부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부인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가 훼손되지 않는 정도까지만 자기부인을 원하십니다. 가정폭력이 결혼 후 3개월 정도에 발생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것은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자기 부인은 자신의 존재가 훼손되지 않는 한도에서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나쁜 행동하는 상대방을 방치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사랑의 원천에 연결되라

 

자기부인으로 인해 메말라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 세상이 존재하기 전에 이미 존재해왔고 바로 하나님이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사랑의 본질, 힘과 능력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사랑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힘과 능력이 우리에게 부어져 그 사랑에 감격하여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살 소망이 생깁니다. 하나님께로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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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4 03:21

세월호의 비극: 통곡의 바다, 절망의 대한민국 (박명림 교수)

통곡의 바다, 절망의 대한민국: '이 못난 나라의 "패덕"을 부디 용서하지 마라' (박명림 교수)



세월호의 비극은 과연 시간의 흐름 속에 잊혀지고 말것인가? 무뎌진 양심과 잠들어 버린 정신...부끄럽지 않은가? 세월호 사고는 "294명의 사망과 10명의 실종"이라는 사고, 그 엄청난 비극의 의미와 함께 또 다른 심각하고 거대한 위기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가와 그 사회의 수준과 존재이유, 현재 대한민국 시민의 의식과 가치관 수준에 대하여 궁극적 차원의 회의(懷疑)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와 같이 박명림 교수의 글을 통해서 그 위기의 의미를 자세히 되짚어 보고자 한다. (기사 내용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점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교수님께서 이해해주시리라 생각됩니다.)


<아래 내용은 기사 중 인용>


1. 산업화와 민주화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유일 선진국이라는 자만에 더해, 전자·반도체·조선·철강·자동차를 포함한 첨단산업들이 세계 선두권이라고 자랑해왔다."


"기술과 산업, 첨단화와 정보화의 이 휘황한 세계 선두권에도 불구하고 급박한 인간위기상황이 도래하자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안전지침, 초기 연락, 위기 대응, 인명 탈출 안내, 구조작업, 정부의 합동 대처는 리더십과 책임감, 신속성과 첨단성, 통합지휘체계의 어느 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우왕좌왕 상태에서 배가 ‘가라앉고’ 꽃다운 생명들이 ‘죽어가는’ 실제 상황을 눈뜨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2. 국가 지도자의 리더쉽


"선장의 경악할 행태는 우리에겐 매우 익숙한 모습이다. 그는 위기시 한국 사회 최고 책임자들의 행동을 그대로 재연했다. 몽골의 고려 침략, 일본의 조선 침략, 한국전쟁 때, 절체절명의 국난에서 국가 지도자들은 늘 국민에 앞서 먼저 도망을 갔다. 심지어 북한의 침략 직후 대통령은 금번 선장과 똑같이 거짓방송으로 국민들을 서울에 남게 한 뒤 자기만 먼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갔다. 그럴 때마다, 위난과 전화에 버려진 민초들의 죽음과 고초는 극에 달했다."


"한국 사회는 꼬리 자르기가 법치와 책임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전국민적 공분을 야기한 사건들도 처벌은 항상 실무급들 몫이었고, 책임자는 권력의 보호 속에 건재했다. 자기 진영과 자기 이념의 유불리만을 따져 처결하는 행태의 반복 속에 국가기강은 뿌리째 무너졌다. 행정·정보기구·군·경찰·기업·금융을 막론하고 동일했다. 지도층들은 바른 애국심과 참다운 공적 윤리는커녕, 법적 책임조차 거의 지지 않아왔다. 무너진 기강, 골병든 나라, 그 썩어문드러진 표출이 지금 진도의 통곡이다."


3. 국가와 문명의 존재이유와 가치


"진도는 근본이 무너진 나라의 참혹한 표상이다. 공직사회의 책임윤리는 파탄나고, 대통령의 어떤 영(令)도 서지 않으며, 사회는 온통 권력과 돈의 힘만 난무해온 모습의 압축판이 세월호 침몰과 사후대처가 폭로하는 한국호의 민낯이다. 이게 과연 나라인가?"


"금번의 경우 한국해운조합의 38년에 걸친 낙하산·전관예우는 정부-조합-기업의 강고한 결탁을 통해 국가의 기업에 대한 합법적 규제를 불가능하게 했고, 끝내는 국민을 죽음의 바다로 몰아넣었다. 세월호 침몰은 전관예우, 관경(官經)유착, 규제완화, 규제작동 불능의 총체적 귀결이었다. 기업들과 은행들의 방만경영, 비자금 조성, 도덕해이, 규칙위반이 초래한 대재앙인 환란으로 인한 고통을 치렀으면서도 또 규제완화인가? 부동산 투기, 족벌경영, 문어발 확장과 자영업 붕괴, 카드대란, 저축은행사태도 모두 규제완화 때문이었다."


"자연상태와 세계 최고 수준의 불평등이 결합된 한국적 삶에서 반(反)생명화와 반인간화는 이제 기축 현실이다. 자살률, 저출산율, 산업재해사망률, 교통사고사망률, 직계존속살인율… 즉 주요 인간지표와 생명지표들은 모두 세계 최악 수준이다. 한국 사회는 이미 인간안전을 뜻하는 문명상태·국가상태(=정치상태)에 반대되는 의미의 야만상태·자연상태(=전쟁상태)에 돌입해 있다. 문명화는 모든 사람이 국가 안에서 안전과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시민자격부여, 즉 시민화(civilis)를 뜻한다. 모든 사람의 평등한 인간화를 말한다."

"그러나 한국의 문명화는 산업화·물질화·정보화의 급진전과 반생명화·불평등화·반인간화의 극심화라는 양극단을 치달았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2003년 이후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자살 숫자는 같은 기간 이라크 전시 사망자보다 더 많다. 한국은 평시 자기살인이 세계 주요 전쟁국가 사망보다도 더 많은 전쟁상태의 삶인 것이다. 믿기 힘든 충격적 현실이다. 타인살인, 군내 사망, 산업재해, 교통사고를 합치면 한국의 인간지표는 세계 최고의 야만성 자체다. 우리는 한국을 보며 국가발전경로에는 후진·중진·선진(先進)국뿐만 아니라 선진(善進)에 반대되는 악진(惡進)국도 있음을 알게 된다."



4. "세월호는 대한민국호의 다른 이름이다." 


"혁명이다. 돈과 물질, 권력과 허세로부터 인간과 생명, 자유와 평등을 향한 새 기풍을 진작하지 않는다면 팽목의 통곡은 머지않아 대한민국을 덮칠 것이다. 아니 팽목은 이미 한국의 압축판이고, 세월호는 대한민국호의 다른 이름이다."

"절대적 비극에는 절대적 반성이 필요하다. 절망적 상황에는 전면적 개혁만이 살길이다. 이 죽음들을 참되게 위로하고 바르게 기리는 길은 한국 사회를 사람 중심 나라, 생명 우선 사회로 환골탈태시키는 것뿐이다."

"청년들은 이 못난 세대, 불행한 조국의 현실을 기필코 혁신하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나라를 발본적으로 뜯어고치라. 이 패덕의 세대, 야만의 국가를 부디 광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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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8 07:24

하나님나라의 영성과 제자도 (김형국 목사)

(아래 본문은 <뉴스앤조이>와 <복음과상황>이 후원하는 '기독청년아카데미 공개강좌' 시리즈 중에 김형국 목사의 '하나님나라의 영성과 제자도, 기독청년 지도력'을 요약한 것.)


  • 하나님나라의 영성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 하나님나라의 영성은 기독청년 지도력과 관련하여 '기초', '성숙', 그리고 '발현'으로 설명될 수 있다.

  • 기초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 거듭남은 복음의 '진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다.

  • 성숙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 되심을 경험하는 것'. 신앙의 내면화가 없이는 이데올로기적 입장정리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 발현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것'. 전도가 중요하다. 전도란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없는 사람을 그 통치권 아래에 오게 하는 것.

  • 기독청년 리더쉽의 문제점
오늘날 우리가 부르짖는 교회개혁이 겨우 교회 내에 민주적 절차를 받아들이자는 것에 불과하다면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그것은 너무나 낮은 차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회와 문화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비전이 주어지는데, 많은 경우 기독청년의 지도력이 발휘되지 않는 것은 기초와 성숙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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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8 00:00

회심 [2] (짐 월리스) - 4. 불의 5. 위험

회심 (2) 


4. 불의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8~10)

(1) 경제적 양극화 p.73

워싱턴 D.C. 지역의 도시 빈민의 문제: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유기의 복합의 문제. '도시 귀환 운동' 또는 '고급 주택화'를 통해 고소득 거주자들이 옛 도심지로 돌아오게 되면, 이들은 퇴거당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p.75

디트로이트에서는 1967년에 소요 사태 발생. 도시 빈민의 분노와 좌절의 폭발. p.76


(2) 경제적 양극화를 구축하는 경제 질서 p.79

전체 경제 질서 속에서 벌어지는 부자들에 의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약탈은 세계 경제 체제 속에서 합법화되고 합리화되었다. 도시 최하층은 경제적인 소모품으로 만들어져 왔다. 그 실업과 피폐함은 체제 유지를 위한 용납할 만한 대가로 여겨져 왔다. 

오늘날의 제국주의는 더이상 영토의 점유에 근거하지 않고 자원의 통제에 근거하는 제국주의 p.84

불의에 기초한 번영의 결과는 불안이다. 의기소침, 냉소, 절망, 향락주의는 모두 부유한 나라들의 문화를 특징짓는 근본적인 불안의 열매이다.


(3) 소유의 노예
오늘날 풍요롭게 사는 자는 자신이 소유자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소유물에 불과하다. 자신의 재산에 노예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돈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다 p.90


(4) 해결방안
① 사회적 무시를 깨드려라 p.94. 삶의 경로를 바꾸어 가난한 자와 구체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p.92.
② 복음주의적 관점: 가난한 자와 동일시 하시는 하나님.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의 성과 (노예제 폐지, 경제 정의, 여권 신장을 위한 투쟁)


(5) 20세기의 왜곡된 복음주의 p.98-99
미국 20세기 복음주의는 부요와 권력에 대한 주류 사회의 가치관과 완전히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복음주의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친구이기보다 성공한 자들과 번영한 자들에 대한 분명한 선호를 나타냈다.


(6) 부에 대한 성경적 관점의 회복 p.100~
① 나눔(희년의 재분배 p.102)은 정상적인 신앙의 결과, 주기적 행사가 아니라 일상적 생활 방식
② 빈곤은 우연이나 자연적 영향이 아니라 불의에서 비롯된 문제
③ 예수님의 산상수훈


(7) 부와 예배와 신뢰 p.104

염려와 안정 p.105: 물질적 필요에 대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제자도

친교에 대한 성경적 비전 p.123 : 삶의 경제적인 측면, 곧 우리의 돈과 소유를 서로서로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나누는 것을 포함한다.

(8) 성령에 의한 새로운 경제질서 창조 p.114

①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은 영적인 하나됨은 경제적 평등과 불가결한 관계가 된다. p.115 대부분의 사람이 가난에 처해있는 세계 속에서 부를 축적하며 풍요를 누리는 부유한 교회는 죄의 증거이며 우상 숭배의 증거이다.

세상은 마침내 극심한 빈곤을 종식할 수 있는 지식, 정보, 기술 자원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일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의지이다. p.124

②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균등'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에 넘치는 기쁨을 만끽하며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p.116

③ 자기 이익을 무너뜨린다. p.117

(9) 노예제도 폐지운동 p.120

① 회심의 열매. 미국 남북전쟁에 이르기까지의 부흥, 복음주의 신앙이 강력하게 발현된 '대각성'(Great Awakening)이 붙들었던 핵심적인 사안.

② 당위적인 교회의 비중립성 p.122
부흥과 노예 폐지론의 연관성
교회의 침묵은 노예 제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것. "교회는 위증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를 떠난다"
교회가 노예 제도를 지지할 때, 교회의 영적 생명과 온전성을 크게 훼손하게 될 것.
노예 제도의 용인은 인간 생명과 가치를 특별히 위협하는 것이고 사랑의 하나님의 의를 침해하는 것이다. 빈곤의 문제도 마찬가지.

(10) 하나님의 회심으로의 부르심 p.125
하나님은 우리의 문화 속에서 활동하신다. 화가와 음악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젊은이들로 구성된 새로운 세대가 이 대의에 헌신한다. 

하나님의 회심으로의 부르심은 '신앙으로의 부르심' 뿐만 아니라 '대의에 대한 헌신으로의 부르심'이다. p.126



5. 위험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여 시기하여도 능희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약 4:1~2)

Preemptive Strike on Iran is Illegal (Jae Young Lee, Ohmynews International)


(1) 전쟁과 평화에 관한 교회의 도덕적 위기 p.128

예수의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의 중심에는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라는 부르심이 있다 (마 5:9) 그러나 현재 교회는 논의자체를 하지 않는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문제로부터 관심을 돌이켜 명목적으로 선한 대의에 집중하게 하는 전략을 가장 선호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략에 말려들어 전쟁과 폭력 문제에 눈먼 채 있는 것이 아닌가. p.130

(2) 기독교 전통에 의한 세 가지 선택과 오늘날의 요청

① 철저한 평화주의: 모든 형태의 폭력과 심지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되는 강압조차도 거부.
② 십자군 성향: '이교도'를 쳐부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치루고, 필요에 따라 무력을 사용해서 기독교를 세운다.
③ 정당한 전쟁: 전쟁이 정당화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기준이 충족되어야 하고 오직 최후의 수단으로서만 수행될 수 있다. 또한 적법한 당국에 의하여 정당한 이유와 의도를 지녀야 하고 성공할 합리적인 승산이 있어야 하며 성취될 선과 비례하는 것이어야 하며, 전투원과 민간인을 구별하여 행해져야 한다.
④ 오늘날의 요청: 정당한 평화주의
: 실제적으로 분쟁을 해결하고, 정의를 성취하며, 평화의 가능성을 더욱 높이는 '변화시키는 주도권'을 추구한다.


(3) 해결방안

① 완악한 마음을 버려라 p.136-137
완악한 마음은 고의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 가깝다.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한다. 이성은 안개로 뒤덮이고 마음은 닫힌다. 완악한 마음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냉담하다.

분쟁과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닫는다. 양심에 아무런 느낌도 없고, 단지 '전쟁이라는 실제'에 대한 두려움, 혼란, 체념 뿐이다. 

평화를 위한 행동을 취함으로써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다시 경험해야 한다.

② 응보의 원리를 사랑의 실천 원리로 대체하라 p.140
내가 당한 만큼 가해자에게 돌려주는 응보의 원리를 따르지 말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화해를 추구하는 것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해의 일은 우리의 소명이다.

③ 정당한 평화 만들기 운동을 하자 p.147
비폭력 직접 행동을 후원하라/ 위협을 감소하기 위한 독립적 주도권을 취하라/ 협동적인 갈등 해결책을 사용하라/ 분쟁과 불의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참회와 용서를 추구하라/ 민주주의, 인권, 종교적 자유를 증진하라/ 정당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을 육성하라/ 국제적 체계 속에 발흥하는 협력 세력들과 함께 일하라/ 상호 협력과 인권을 위한 국제적인 노력과 국제 연합을 강화하라/ 공격 무기와 무기 거래를 감축하라/ 풀뿌리 평화 만들기 모임과 자발적인 단체들을 격려하라

④ 기도하라 p.152
에베소서 6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정사와 권세에 대항하는 영적전쟁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기도는 영적전쟁을 위한 무기이다.

권세가 제공하는 안전에 대한 저항자가 되기 위해서는 공포, 소유물, 돈, 권력, 사상, 대의의 영적인 노예 상태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하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안전을 구해야 한다. 오직 기도만이 이것을 가능케한다. p.154

기도는 마음을 부드럽게 해서 적개심을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적을 마음에 품게 되고 그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된다. 그들의 관점에서, 곧 그들의 감정, 두려움, 고통, 분투, 기쁨, 소망으로 사물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적이 더이상 적이 아니요 이웃으로 변화된다. 

토머스 머튼(트라피스트회 수도사)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 -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적을 비인간화하는 것이다. 비인간화를 통해 적들은 정상적인 인간적 감정과 가치관을 소유할 수 없는 자들이기에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우리의 생활 방식을 위협한다. 경제적 양극화 사회에서 가난한 자들과 얼굴을 맞대어야 하는 것과 같이 폭력과 보복적 폭력의 세대에서 회심은 수많은 희생자의 인간적 실제성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p.158

⑤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라 p.160-161
평화를 만드는 자는 그에 따르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평화만들기는 결과적으로 커다란 갈등을 낳을 것이다. 평화주의 옹호자들은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고난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에 '정당한 전쟁' 옹호자들은 너무 많은 전쟁을 용납한다.

평화를 만들기 위한 최선의 활동은 더 많은 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을 낳는 종류의 활동이다.

⑥ 폭력에 직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억하라 p.163
역사 속에서 그 승리는 보장되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빛 속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쟁의 기반이 두려움이고, 결국 더 많은 두려움으로는 전쟁을 압도하지 못할 것이다. 대신에 폭력은 소망으로 극복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폭력의 권세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우리가 승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날에 주님이 승리하리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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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7 23:55

회심 [1] (짐 월리스) - 1. 서문 2.부르심 3.배반

회심 (1)

 

1. 서문


(1) 역사 속의 회심 (Conversion in History) p.24

교회가 현재의 역사적 실제와 관련이 없었다는 것은 문제예를 들어인종차별 문제의 본질은 깨어진 관계' p.25 였는데이를 단순히 사회적 논쟁거리로 처리

(2) 
회심의 과정 p.26

성경으로 돌아가 예수를 새롭게 만났다 
à 개인적 신앙과 사회적 실천간의 분열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à 실제 문제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3) 
전도는 복음의 정수를 전하는 것 p.28 

(4)  복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에 대한 문제의식 p.29

시대를 향한 회심의 의미를 오해역사적으로 적실한 제자도에 대한 이해없이 허둥댄다.

 

 

2. 부르심 

(1) 관련 성경말씀
"
회개하라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4:16~17)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3:3~7) + “너희는 그의 소유요 거룩한 백성이니” ( 2:9

(2) 
본향으로의 부르심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

거듭남은 내면의 질서체계를 회복하는 경험이기심어둠우상습관속박 è 하나님 나라의 경험이다

내 안에서 경험한 하나님나라와 사회질서간의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


(3) 자기애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목적이 기준과 척도가 되는 삶

(4)    이데올로기적 처방의 한계 p.52

 

 

3. 배반


(1) 자기중심적 문화의 영향과 그 결과자기중심적 종교정체성 상실악한 사회제도에 적극적 가담 또는 방임

(2) 거짓 예배 –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문화적 우상 숭배를 겸한다. 

(3) 
복음의 사유화 p.68

사회현상유지를 지지하는 개인주의적 신앙하나님나라를 억누른다복음의 공적인 의미는 상실됨.

(4) 
죄와 구원의 사회적 의미 p.69
"
세상의 죄"의 공범임을 자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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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5 05:19

그리스도인의 현실인식,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말씀시리즈     설교_김형국 목사

06월 21일_그리스도인과 이념논쟁, 복음이냐 이념이냐
06월 28일_그리스도인의 현실인식.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07월 05일_세상 속에서 새 여행을 시작한 사람들- 세례식

그리스도인의 현실인식,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서론: 많은 사람들이 주일 교회를 찾을 때 갖는 기대


우린 선한 의도와 확신을 갖고 행동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렇게 행동할 경우엔 우리가 기대한 좋은 결과가 아닌 우스꽝스러운, 고통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현실이 어떤지 알지 못하면, 현실인식이 약하면 우리의 선한마음과 확신은 종종 좋은 결과가 아닌,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주일에 교회를 찾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얻을 것을 기대하곤 한다. 살기 힘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신다는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또 많은 이들이 그렇게 고단한 현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듣기 위해 교회를 찾는다고 믿는다.

 

1.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사명


빌립보서 1:9-11 9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10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가)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사명 (10하-11절)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고(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삶이 변화되어야(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한다. 이것은 마태복음 5장의 빛과 소금의 맥락과 동일한 내용이다.

 

마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소금의 짠 맛과 빛의 속성은 곧 착한 행실이고, 이것은 빌립보서 1장의 ‘의의 열매’(삶의 변화)를 뜻한다. 우리는 우리의 착한 행실 = 의의 열매 = 삶의 변화로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나) 사명을 이루기 위한 방법(dynamics, 9-10절상)

이러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이 깨어진 세상을 향한 사랑이 풍성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가능하다. 사랑이 지식과 통찰력으로 풍성하게 되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데 이 분별력을 가져야 우리의 인격과 삶이 변해서(순결하고 흠이 없어, 의의 열매)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다) 지식과 모든 통찰력의 중요성

지식(evpi,gnwsij) - 이 단어는 바울 서신 속에서 15회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여 알아가는 살아있는 지식을 뜻한다. 흔히들 말하는 지식이 아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통찰력/‘총명(ai;sqhsij) - 이 단어는 신약에 1회 사용되었는데 70인역의 용례를 보면,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진 통찰력(insight) 또는 분별력 (discernment)을 뜻한다. 이것은 상황에 대한 지식이다.


지식과 통찰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어떻게 구체적인 삶의 현장/context에서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상황에 대한 지식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사랑, 선한 의도는 곡해되거나 이용될 소지가 많다. 그래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곤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상황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말씀이 그대로 실천되었다. 복음이 강력히 선포될 때 사회를 개혁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들이 일어난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다.

 

2. 역사적인 예들


존 스토트,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IVP)


가) 18세기 영국의 웨슬리의 부흥운동

존 스토트의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란 책을 보면 18세기 영국의 웨슬리의 부흥운동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웨슬리는 당시 영국의 복음전도자로서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회심했다.

 

먼저, 18세기 영국 상황에 대해 그가 쓴 표현을 보자.

“스포츠를 위해 짐승들을 고문하고, 대중이 짐승처럼 곤드레 만드레 되었으며, 아프리카 흑인들을 비인간적으로 매매하고, 동포들을 노예로 수출하고 팔기 위해 유괴하고, 어린이들의 높은 사망률, 보편적인 도박 중독, 감옥제도와 형법제도의 잔인함, 부도덕에 대한 탐닉, 극장의 매춘, 점차 만연해가는 무법천지, 미신과 외설, 정치적 수뢰와 부패, 교회의 교만과 흉포함, 이신론의 피상적인 겉치례, 교회와 정부 안에 만연한 불성실과 품위저하”(Stott 22, 웨슬리 브레디의 글을 인용)

 

이러한 상황에서 웨슬리는 회개하라는 메시지로 부흥운동을 시작한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회적인 대의를 추구하도록 촉구했다. 타락한 세상을 좇지 말고 정의를 행하고 사랑을 베풀라는 메시지였다. 이러한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이후의 복음전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윌리암 윌버포스와 ‘클라팜파’(이 마을에 살던 교구 교회 중심의 정치 세력으로 윌버포스와 함께 노예제를 폐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역사가들은 영국에 프랑스와 같은 피비린내 나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평가한다. 웨슬리의 부흥운동으로 인해 사회적 양심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웨슬리가 복음만 선포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함께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세기 영국은 노예제와 노예무역이 폐지되고, 감옥 제도의 인간화, 공장과 광장의 환경 개선, 가난한 자들의 교육, 노동조합이 생겨나 노동자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변화를 겪게 된다.

 

나) 19세기 미국의 챨스 피니의 부흥운동

19세기 미국의 찰스 피니는 유명한 부흥사로서 많은 이들이 그를 개인적 구원만 선포했던 부흥사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회심과 개혁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교회의 중대한 임무는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교회는 원래 개혁자 집단이 되도록 조직되었다. 기독교를 고백하는 것 자체가 세상의 전반적인 개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고백이며, 사실상 그러한 맹세다” (종교의 부흥에 대한 강의, 23번째 강의)


그의 비서로 일하던 데오도어 웰드는 그의 영향을 받아 반노예제 투쟁에 전 생애를 헌신했다. 이 후 19세기의 왕성한 기독교 선교는 복음 전도와 사회 개혁이 함께 선포되었다.

 

다) 상황에 대해서 무관심해지게 된 역사적인 이유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흐름이 상황에 대한 무관심으로 흘러갔고. 존 스토트는 그의 책에서 이러한 무관심의 다섯 가지 이유를 소개하고 있다.


존 스토트,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IVP) 다섯 가지 이유


1) 신학적 자유주의와의 싸움 (1800년 대 말~1900년대 중엽)

신학적 자유주의는 이성을 중요시하는 풍조로, 권위 있는 믿음을 이성으로,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다시 분석하자는 사조이다. 성경의 기적과 부활,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 등을 부인하고 성경을 조작한 글로 만들었다. 

2) 사회 복음에 대한 반발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는 것,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 곧 복음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을 사회 복음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회 복음에 보수주의자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3)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비관주의

1차 세계 대전 이후 사람들은 인간의 잔학함을 보았고 그래서 사회를 바꿔봤자 소용없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4) 전천년설의 만연

전천년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세상은 점점 악해질 것이라는 설이다. 그렇기에 세상을 개혁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이다.

5) 기독교의 중산층화

원래 기독교는 늘 서민중심이었다.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점점 기독교가 중산층화되었다. 자기 기득권, 현상유지하고 싶어하는 보수성향이 강해졌다. 예리한 사회개혁적 칼날이 사라졌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기독교는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라) 초기 선교 이후의 한국 교회

이러한 흐름 가운데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왔다. 그들은 사회적 책임에 관심이 많았고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그러나 삼일운동 이후 일본과의 정치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조선인의 영혼만 책임지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한국 전쟁 속에서의 이념적 갈등을 겪으며 인권이나 민주화, 노동조합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자의 전유물이라 주장하는 군사독재정권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그들을 지원했다. 사회문제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면 안된다는 인식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70~80년대의 민주화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흐름에 문제를 제기하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40대 후반, 50대 초반의 목회자들이 그러한 세대다.


한국의 이러한 시기 직전, 미국에서는 1966년 Wheaton Decalaration, 1974년 Lausanne 선언이 있었는데, 이 때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에 대한 논의을 정리했고, 복음전도와 사회적, 정치적 참여는 둘 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일부라는 선언이 있었다. 7~80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선언을 공부하며, 복음이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 교회는 로잔선언의 흐름에 속해 있는 교회이다. 이 흐름은 보수교회들도 참여하고자 하지만, 실상 그들은 로잔선언의 내용을 실제로 따라가진 못하고 있다.

 

3. 21세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현실 인식을 위하여...


가) 복음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

그런데 눈에 보이는 사회, 정치 등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갖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축소되곤 한다. 당시 시대 상황에 의해 조종당하고 영향받을 위험성이 있다. 그렇기에 복음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핵심인 것이다.

 

나) 상황에 대한 인식


①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념의 문제

한국 사회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종식된 세계적인 흐름과 무관하게 냉전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존재하는 특별한 상황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는 해방전후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반공주의적이고, 친미적인 성격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대 후반에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이 반공주의가 사회적으로 재검토되고 있고,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성찰에서 빈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된 보수 교회는 반공과 친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 형성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성경적 입장에서 패권주의와 승리주의에 대한 논의, 그리고 종교와 권력과의 관계, 국제 역학의 윤리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② 민족적인 측면에서 ‘통일’의 문제

냉전 이데올로기의 잔해물로서 ‘분단’은 우리 민족에게 멍에와 같은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쇠퇴하고 있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유일하게 그것이 첨예하게 대립되어지는 곳이 한반도라면, 위에서 언급한 한국 개신교의 태생적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증오와 용서치 못하는 민족적 문제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정교 분리라는 허울 아래, 통일에 대한 논의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신학적인 재정립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화해의 복음을 가르치고 행하는 기독교의 근본 메시지에 견주어 이 민족적 과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논의가 깊어져야 한다. 비록 실제적으로 통일을 준비하며 북쪽 동포를 돕는 일에 한국 교회가 선두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와 함께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논의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성경에서는 민족(e;qnoj)을 어떻게 보고 있고, 민족의 화해를 어떻게 다루는지 등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과 연구가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남쪽의 퍼주기식의 지원은 안된다. 모두 군비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며 북한에 대한 지원에 반대한다. 그러나 더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북한에 대한 남한의 지원은 2조원이었지만, 동독에 대한 서독의 지원은 100조원이었다. 통일을 위해선 더 큰 대가지불이 필요하다.


우리의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관심이 없이 개인 구원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들목의 통일비전트립, 통일스터디, 조선족교회를 통한 지원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되고 공부하고 있다는 것은 작지만 자랑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통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공부해야 한다.

 

③ 경제적인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의 문제

신자유주의는 지구촌 전체를 하나의 ‘시장 경제 원리’로 새롭게 통폐합하고 있다.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도 국내에서 논란이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이 경제적 질서를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유방임 경제를 지향하기에 비능률이 해소되고 경쟁시장이 효율적이 되며, 국가 경쟁력이 강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대하는 편에서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인한 빈부격차의 확대, 시장 개방 압력으로 인한 후진국과 선진국의 갈등 등은 낳는 문제를 지적한다. 기복주의적 성향이 강한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물결에 대하여 신학적인 성찰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잘 믿으면 물질의 축복을 받는다’는 메세지에 경도되어 있고, IMF 이후에 양산되기 시작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 등은 외면하고 있는 형편이다.(‘이랜드 사태’는 이 비정규직 문제를 한국 전체 기업과 한국 전체 노조를 대리해서 싸우는 모습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기독교적 기업이 1990년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회적 약자로서의 비정규직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첨예하게 관찰하게 하는 사건이기도하다.) 삶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시스템과 그로 말미암은 결과들에 대하여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성찰이 긴급하게 필요한 때이다.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탐욕, 욕망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 시스템은 반대하지만, 여전히 탐욕적이며 그 시스템의 유익을 누리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쉽게 반대하거나 찬성할 수 없다.

 

④ 문화적인 측면에서 ‘종교 다원주의’의 문제

한국의 문화적 상황은 ‘관용’을 중시하는 종교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절대 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사상과 문화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배타적인 입장은 사회적인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문화적 상황 변화에 둔감한 채, 전근대 (pre-modern)에 행해지던 전도와 선교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때, 그것은 한국 사회 속에서 무례하며 공격적인 모습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종교 다원적 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배타적 진리를 선포하고 살아내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자의 신학적 성찰과 목회자의 목양적 접근이 시급하게 필요한 실정이다.(‘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은 종교다원적 세계 속에서, 더 깊은 성찰과 준비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 교회의 선교와 전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다원적 자세는 일반 개인들의 삶에 있어 도덕적 수준과 삶의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고, 이에 대한 신학적, 목회적 성찰과 대안은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⑤ 교육적 측면에서의 다음 세대에 대한 관심

여러 다른 사회적 이슈들 중에서 목회자와 신학자가 다루어야 할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는 입시 또는 교육과 관련된 부분이다. 한국 사회의 독특한 특징인 ‘입시 현상’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고 있는지,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자기의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세상의 풍조를 성경적 가치관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특별히 학력이 모든 것을 좌우하다시피하는 학력 사회적인 성격을 가진 한국 사회 속에서 우리가 다음 세대를 교육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학적, 목회적인 성찰과 연구, 그리고 대안이 필요하다.(기독교학교연구소, 자료집 “입시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2007))

 

⑥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관심

어느 사회나 그렇듯이, 한국 사회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적 이슈들을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교회는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약에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돌아보고, 그들에 대한 학대에 대해 당신 자신의 백성을 죽이겠다고 경고(출 2:21-24)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라며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눅 10:29-37)도 같은 맥락이다.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성경 신학적 관점에서 불러일으키고, 실제적인 대안을 목양적으로 찾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늘 약자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 여성,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 미성년 사회탈락자..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다.

 

⑦ 전 지구적인 맥락에서의 환경에 대한 관심

서구의 기독교는 창 1:26-27에 대한 오해와, 그 성장과 맥을 같이한 성장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한 비난이 옳건 그르건, 누구보다도 피조 세계의 안위에 관심을 가져야 할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이 환경 문제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가장 낙후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지 한국 사회적인 맥락을 넘어서서 전 지구적인 공동체적 맥락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환경에 대한 목회적이며 신학적인 성찰과 대안을 찾아내어 개개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실제적인 행동과 삶의 방식으로 옮기는 일은 매우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변온동물인 개구리를 삶을 때, 천천히 높아지는 온도에 개구리는 여유있게 적응하며 유유히 헤엄치다 죽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상황이다. 환경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실천하고 있는가. 우리는 괜찮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다음 세대는 어떠한가. “우린 자연을 후세로부터 빌려쓰고 있다.” 빌려쓰고 있는 자연,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소유인 이 자연을 우리의 탐욕과 안락함 때문에 파괴하고 있지 않은가.

 

다) “복음 + 상황 = 의의 열매 = 하나님께 영광”의 오래된 전통 회복

작은 면에서부터 내가 아는만큼 실천하자. 말로 비판하기 보단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 자가용을 타기보단 걷고, 종이컵보단 개인컵을 갖고 다니고, 물과 에너지를 아껴쓰자. 이것들은 우리 아버지의 것들이다.


공부해야 한다. 존 스토트의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읽어라. 아모스서를 묵상하라. 상식 이하로 풍조에 따라 움직이지 말자.


연합과 지원을 통한 사회적 변화를 꿈꾸라. 내가 관심을 가진 영역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단체에 지원하고 함께하라. 삶의 현장에서, 직장에서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함께 할 수도 있다. 그것은 기업차원에서도 비용절감으로 할 것이나, 그것보다도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변화를 실천하라.

 

결론: 그리스도인들의 현실 인식의 궁극적인 목적

그리스도인들의 현실 인식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하늘 아버지께 영광돌리기 위해서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뭔가 다르구나, 역사에 의미있는 일들을 하는구나' 라는 칭찬이 하늘 아버지께 영광으로 올려지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우리끼리만 편하게 잘 사는 걸 원치 않으신다. 불의한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를 하나님은 역겹다고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굳건히 잡고 깨어진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현실을 바로 인식하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행동하길 바란다. 그럴 때 하늘 아버지께서 영광받으실 것이다.

 

 

삶으로 말씀읽기

1.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떤 것이 있는가? 또한 사회적,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이 있는가?

2. 빌립보서 1:9-11을 요약해보라.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선행 조건들이 있어야 가능한가?

3. 나는 오늘날 우리의 상황 속에서 특별히 어떤 부분과 관련하여 세상을 좀 더 바르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4.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교회가 특별히 공통적으로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할 분야가 있다고 도전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1) evpi,gnwsij 바울 서신에 15회 정도 나타난다. 단지 gnw/sij 라고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분분한 해석이 있다 (see O'Brien 76). Bultmann은 이 단어는 동사형과 함께 ‘almost a technical term for the decisive knowledge of God which is implied in conversion to the Christian faith'라고 보았다 (TDNT 1, 707). 이 단어의 구약적 배경인 ‘하나님을 안다,’ 또한 이 단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2) 이 단어는 신약에서는 a hapax legomenon이다. O'Brien은 LXX의 27회 중 22회는 ‘practical understanding which is keenly aware of the circumstances of an action'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It might be translated 'tact' or 'the feeling for the actual situation at the time'” (O'Brien, 77). Silvas는 “discernment - the practical application of knowledge”로 이해했다 (58-59). 이 단어를 영어 성경 번역본들은 judgement (KJV), discernment (NAS), insight (NIV, NRS), understanding (NLT)로 번역했다.

 

(강인철은 그의 책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2006, 중심)에서 한국 개신교가 어떻게 반공주의를 형성하였으며, 2000년 대에 접어들면서, 반공주의의 설득력이 빠르게 감소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달리, 어떻게 개신교 보수주의가 여전한 반공주의를 고수할 수 있는지에 그 역사적, 사회적인 원인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김단일은 “1990년대 개신교 신 교권그룹의 형성과 헤게모니 세력화에 관한 연구” (서울 사회학 석사 논문, 2004)에서, 보수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물적, 인적 자신감과, 개혁적 정권의 집권과 반미친북 정서의 확장을 통한 세계관의 위기 그리고 사회적인 공신력의 하락에 대한 위기감이 현재의 종교 권력화하고 있는 보수 개신교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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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5 05:17

그리스도인과 이념논쟁, 복음이냐 이념이냐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말씀시리즈     설교_김형국 목사

06월 21일_그리스도인과 이념논쟁, 복음이냐 이념이냐
06월 28일_그리스도인의 현실인식.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07월 05일_세상 속에서 새 여행을 시작한 사람들- 세례식



그리스도인과 이념논쟁, 복음이냐 이념이냐


서론


목사님들과의 회동에서 듣게된 두 가지 일화. 어느 한 교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한 영향력에 대해서 설교 내용 중에 잠시 다루었을 때에, 예배 중에 몇 분이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걸어나 나가셨던 사건도 있었고, 또 한 교회에서는 서거가 있었던 그 주와 그 다음 주의 설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었는데, 어떤 형제가 헌금봉투에 '한국사회에 이렇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교회에서 이에 대하여 한 말씀도 없어서 저는 교회를 떠납니다'라는 메모를 넣어서 목사님이 우연히 읽으시고 놀랐던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나들목교회에서도 서거 사건에 대해서 설교 시간에 다룬 적이 있었다. 교회에서는 이러한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 다루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좌'나 '우'로 속할 것을 강요하고 그러한 딱지를 붙이는 데에 익숙하다. 한국 교회는 사실 이러한 이념논쟁의 한 가운데에 있다. 여전히 냉전이데올로기는 현대사회 한반도에 남아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한국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한국 기독교와 이데올로기와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이데올로기와 한국 교회

가) 해방 전

● 1919년 3.1 운동 -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생존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 가운데 한국 기독교는 희망이었다. 한국 기독교는 반제국주의 및 민족주의를 신앙적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였다. 독립운동 참여자들 중에 기독교인은 주도적 역할.

● 탈정치적 선교사 -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탄압이 교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자, 미국 선교사들은 민족주의 이념의 영향을 배제하고자 탈정치화 추구. 청년 기독교인이 고민하다가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사회주의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동휘(교회 전도사)와 여운형(신학 공부를 하였음)은 조선 사회주의를 이끌던 사람들이었다. 

● 1925년 조선 공산당 결성 - 조선 공산당은 기독교가 반민족주의라는 이유로 기독교를 반대하기 시작. 이로 인하여 갈등이 촉발되기 시작. 기독교인들을 '일본 앞잡이'라고 하며 살해 및 탄압. 보수 기독인이 이에 반발하여 길선주와 같은 분은 공산주의자들을 '말세의 징조', '사탄'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기독인 박해로 인해 1932년도 (한반도 기독교 대표단체) 조선 예수 연합공의회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공식적으로 반대. 하나님의 뜻에 맞지않는 다는 이유로.


나) 해방 후와 6.25 전쟁 전후

● 김일성 정권 출현 - 친일세력의 청산과 농지개혁을 통해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기독교 60%가 북쪽에 거주. 토지개혁을 이유로 토지를 박탈하고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기 시작하여 윤하영, 한경직 목사님을 중심으로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결성하여 정치적으로 저항하려고 했으나 와해되고 말았다. 해방 후 3년동안 신앙으로 인한 박해, 계속적인 저항으로 박해를 받다가 기독교인들이 대거 월남하게 됨.

● 기독교인 대거 월남
북쪽 지역의 20여만 명의 신자 중에 7~10만명이 월남하게 된다. 북쪽에서 토지가 박탈되고, 투옥과 죽음을 경험한 상태에서 월남을 하게 된 것이다. 북한의 공산주의가 유물론을 기초로 하며, 종교는 아편이라는 무신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서 박해를 가했기 때문에 월남 기독교인들 눈에는 북한 공산당은 사탄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었다.  

● 반공 친미의 이승만 정권
남쪽에서는 신탁문제가 있었다. 남과 북이 각자 정부를 세울 것이냐의 논의도 있었다. 중도 우파 또는 중도 좌파들은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려고 했지만, 남쪽의 기독인들은 그들이 공산주의의 실제를 알지못하는 무지 속에 있다고 여겨서 이러한 움직임을 배제하고 남한만의 이승만 정권을 설립.

● 6.25 전쟁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손양원 목사님 순교. 공산주의에 의하여 거의 박멸되다시피 되었다.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철학적 사유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오늘날까지도 북한 공산주의는 '악마', '사탄'으로 이해되고 있다.

● 전쟁 후 미국의 막대한 원조 물자
1950~1954년간 미국 장로회선교회, 감리교를 통해 막대한 원조 물자가 한국에 공급되었다. 이로 인해 남한의 기독교인들은 북한 공산주의로부터는 생명의 위협을 경험한 반면에, 미국으로부터 한국사회의 재건에 필요한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을 매우 우호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


다) 군사독재 시절부터 현재

● 군사독재 시절 -  군사독재를 한국 기독교가 용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군사독재가 공산주의보다는 낫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빨갱이를 막는 군사독재를 지원하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조찬기도회를 통해 군사정권을 축복했다.

옛 세대들이 '빨갱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그냥 가볍게만 여길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민주화 운동은 용공적이라고 정부가 탄압하였다. 수많은 간첩단 사건이 있었지만, 그 중에 적지 않은 사건들은 조작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반공주의는 거의 신앙의 수준으로 내재화되기 시작한다. 진보진영이 반공주의를 극복해보고자 하였으나 한국 교회에서 소수였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힘.


● 민주화 시절 

그러나  더 큰 혼란이 있었다. 90년대 공산주의 몰락후 냉전 이데올로기는 해체되고 있었으며 민족주의가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 남북대화 및 화해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반공주의에 물들어있던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현실을 수용하기 힘들었다. 이 상황을 공산주의가 다시 적화통일을 꾀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강인철 "반공주의가 사회 전체적으로 해체되는 수순을 밟고 있었으나 오히려 이 시기에 개신교 반공주의가 더 강화됨."

"한국 보수 기독교는 평화통일 보다는 멸공통일에 더 익숙하고, 평화 공존보다는 흡수 통일을 더 선호하며, 화해 협력보다는 고립 붕괴를 무의식적으로 희망하는 경향을 갖는 전투적 유신론에 입각한 기독교적 승리주의, 힘에 의한 통일론, 혹은 증오의 영성에 더 깊이 고착되어 있다." (이문식, 한국교회의 평화의 영성에 대하여, 5)


● 2000년 이후 정치세력의 움직임

극보수적인 지도자들이 한국사회가 좌파에 의하여 적화통일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조성하면서 교회를 좌우의 이념갈등에 아주 적절한 일꾼으로, 전략적 그룹으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조갑제. 

조갑제 (극우 보수 언론인) "그래도 한국에는 잘 조직된 거대한 반공 보루가 있습니다. 전인구의 30%나 되는 개신교 세력과 약 70만명을 헤아리는 군대가 있다" (2000, 자신의 홈피)

조갑제는 기독교 궐기론을 주장, 2003년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의 주요 인물로 등장, 3.1절 친북반미좌파 종식국민대회 등을 중심으로 보수 기독교인들을 결집. 

2000년도에는 보수 기독교인들을 정치적으로 선동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반대편에서는 진보주의자들이 "예수는 사회주의자였다"라는 단순논리를 들고 나왔다. 이들의 영향은 크지는 않았다. 

이러한 대립이 바로 현재 한국사회의 자화상이다.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시청 앞에 모여 '반북,친미'를 외치고 있는 한국교회의 슬픈 모습이 위와 같은 연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대통령이 '좌파 대통령이다'라고 하면 교회는 더 이상의 고민없이 자연스럽게 그를 '악마'로 이해한다. '공산주의자다', '사회주의자다', '좌파다' 라고 하면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한다.



2. 이데올로기의 성격


가) '이데올로기'의 어원 - 계몽주의 시대에 출현
1789 프랑스 혁명

나) '이데올로기'의 뜻
이데올로기는 '철학'과 같은 뜻이 아니다. 철학은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 등을 사유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데올로기는 비판적 사유를 넘어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그것에 헌신하고 행동하는 것을 요구한다.

다) '이데올로기'의 성격

이데올로기 자체가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우트바르트(Gooudzwaard), 현대 우상 이데올로기 (Idols of ou Time), IVP, 26-28
(1) 세워 놓은 목표가 비상한 중요성을 갖는다. - 고상하고 선명한 목표 "이렇게 하면 잘 살게 된다"
(2) 수단이 전혀 제약 없이 활동한다. - 목적을 위한 모든 수단이 정당화된다
(3) 목적이 참된 가치 기준과 규범을 왜곡시킨다. - 목적의 중요성 앞에 선한 규범이 목적을 중심으로 재편성된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기본적 권리들이 재해석 된다.
(4) 목적은 새로운 수단들이 제시하는 법률에 적응할 것을 요구한다.
(5) 목적이 자체의 거짓원수를 만들어낸다. (윗책, 26~27) - 이 목적에 따라오지 않는 자는 '적'일 뿐이다. 반동분자를 창출. 여기서 증오의 태도가 나온다. 그러한 반동자를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종교의 대체물이며, 그 시작부터 마귀적인 것이다" (윗책, 20) - 이데올로기를 통해 세상을 보게된다. 하나님이 할 일을 이데올로기가 대신하게 된다. 한국 교회는 본래 하나님만을 섬기는 교회였는데, 이데올로기가 들어오면서 우파나 좌파이든 이데올로기가 하나님처럼 여겨지게 되고 증오 감정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나님과 이데올로기를 겸하여 섬기는 한국교회. 문화 속에 스며든 이데올로기를 자기 사유과정 속에서 무조건적으로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


3. 무엇이 '우리'를 규정짓는가?

갈 3:26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27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8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가) 1세기 교회의 문제와 우리의 문제

(1) 1세기 교회의 문제는 유대인과 나머지 사람들간의 관계가 주된 문제였다. 

롬 9~11장 유대인 예수와 헬라인이 수용되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유대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민족문제.

고대 경제를 지탱하던 노예제도였는데, 이렇나 계급문제, 남녀차별의 문제가 있었다. 그 시대는 그러한 차별문제가 인식되지도 않을 정도로 남자 중심주의였다. 고대 사회는 여자를 인간의 레벨로 올려놓지 않았다.


(2) 오늘날 우리의 문제
① 다민족사회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준비 안 된 한국 교회 
② 노예제도는 없지만 경제적 양극화와 그로 인한 대물림. 
③ 양성평등 문제 
④ 좌와 우의 이념갈등


나) 복음의 우월성 

바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다"
좌파이든, 우파이든, 경제적 지위가 어떠하든 자기를 규정하는 우월적 기준이 복음이 되어야 한다. 바로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 우리를 규정하는 세가지
(1) 우리는 죄인이었고 지금도 죄성(자기 중심주의)를 가지고 있다.
(2)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을  믿어 그리스도께 속한다. 세례를 받는 의미. 그리스도와 하나된다는 의미
(3) 이제는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리스도로 옷입게 되었다. 우리의 추잡한 것이 덮혀졌다.


따라서 복음은 무엇보다도 우월하다. 복음주의자는 이제 이데올로기를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다) "복음을 가진 자의 삶을 위한 7가지 가이드 라인"

(1) 상대방이 거짓 원수/ 적이라는 속임수에서 벗어난다.
내 속에서 적개심과 분노가 일어날 때 빨간불이 켜져야 한다. 이를 경계하라. 옳으니까 의분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전혀 관계없는 문제에서 비롯된 분노가 이슈 한 가지를 통해서 표출되는 경우일 수 있다. 적개심을 경계하라.

(2) 상대방을 형제로서 이해한다.
우리가 아무리 달라도 형제이다. 
나는 남자이지만 여자를 이해하려고 하고, 자유인은 종을, 우파는 좌파를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나 우리나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결국 그는 내 형제이기 때문이다.

(3) 하늘가족을 이해하는 것을 통하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자세의 부족함을 보완한다.
세상은 복잡하다. 나의 이해는 제한적이고 파편적이다. 따라서 겸손함과 자기부인이 필요하다. 자기오류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에 해당한다. 토론하는 사람 중에서 기본적인 준비와 공부를 하지 않고 토론하는 경우가 있는데, 옳지 않다.

(4) 하늘가족과 대화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좀 더 바르게 이해한다.
세상은 좌우로 분리해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언론의 경우, 좌나 우로 편향된 기사를 다루는 언론들이 있다. 세상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잘못하면 이러한 언론에 의하여 집단적으로 조작될 수 있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에 의하여 조작되는 것을 용납해서야 되겠는가. 따라서 세상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를 나는 반대해, 나는 찬성해"라고만 하면, 여러분은 초등학생인가? 대안은 고민하지 않는가? 정답을 당장 찾지는 못하겠지만 좀 더 공부해야 한다.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보완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강점이다.

(5)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오늘날 깨어진 세상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더욱 온전히 발견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민과 이 시대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는 지를 분별해야 한다.

(6)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자유와 판단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소수자의 의사표현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침묵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나와 의견이 다르거나 심지어 잘못된 내용의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7) 하나님의 뜻으로 분별된 일일 경우, 교회 공동체에서 합의되지 않았다면, 각 개인이나 작은 그룹이 믿음으로 행동하고 교회 공동체는 이를 존중한다. 다양한 목소리와 그룹이 존재하는 곳이 교회이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념에 대한 우월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결론: 우리 한국 교회 업그레이드!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 교회는 슬픈 아픔이 있다. 반공주의라는 이념이 논리적이지 않으나 정서적으로 박혀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머리 껍데기가 벗겨지고 탄압받았기 때문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다는 것은 이해해야 한다.

뼈속 깊이 남아있는 슬픔과 고통이 있지만, 그 아픔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치유하여야 한다. 그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크신 우리를 붙들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행동해야 한다.

나들목 교인들이 수많은 이슈들과 문제들 앞에서 사람들을 포용하고 중심을 잃지 않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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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4 06:13

의심의 사유기능 & 성령의 능력을 통한 개혁 (김회권 교수)


김회권 교수

의심의 사유기능

"의심을 통과한 확실성만이 양심의 승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의심은 사유의 가장 심원한 작용입니다...해체주의의 의심의 해석학은 미쉬나, 탈무드,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심을 인간의 사유작용의 가장 격조 높은 한 양식으로 봅니다. 김교신은 '51%의 확신과 49%의 의혹이 싸우는 것이 신앙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시는 사유할 필요도 없는 태만한 안정감으로, 몽롱한 안정감으로 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철학적 사유, 왕성한 사유를 지지하고 옹호합니다."

"기독교가 귀납적이고 파편적이고 국지적인 현장에서 진리임을 입증시켜서, 그것들을 합하여 다시 한 번 기독교의 진리성을 귀납적으로 옹호해야지, 기독교 세계관의 연역적 엄호를 받으면서 태만한 사고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벌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유의 복잡한 층위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한 개혁

"종교개혁 교회의 특징은 항상 성령에 의하여 개혁되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개혁된 사람만이 공동체를 개혁할 수 있고, 개혁된 공동체만이 이 사회를 개혁할 수 있고, 개혁된 인류 공동체만이 온 피조세계를 개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령의 갱신능력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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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4 06:10

명랑한 마음 (R. W. Emerson)

명랑한 마음


매일 명랑한 마음과
위대한 목적을 갖고 일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날의 주인이다.
나는 평범한 것을 마음에 품는다.
일상의 평범한 것, 하찮은 것을 탐구하고
그 발아래에 앉는다. 나에게 오늘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달라. 

그러면 과거와 미래의 세계는 그대가 가져도 좋다.


- 랄프 왈도 에머슨의《스스로 행복한 사람》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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