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03 03:46

진정한 복음을 누리기 위해서는 (손기철 장로)

진정한 복음을 누리기 위해서는 (손기철 장로)


신앙과 실제의 불일치의 문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을 믿고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의 속에서 하나님의 영향력과 통치권이 상실되었는가?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진정 우리는 복음을 알고 있는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능력인데, 실제의 삶이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원에 앞선 문제, 복음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정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설교를 통해서 전달되는 복음의 정의와 내용이 부정확할 때가 있다. 복음의 진실된 모든 의미를 짦은 설교 시간에 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복음의 왜곡이 발생할 있다. 복음의 의미전달에서 간과될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시대와 사회를 초월해서 반드시 전달되어야 하는 진정한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

 

구약의 율법은 신약의 시대 이후로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신념은 잘못된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구별되는 것이지만, 진정한 복음은 율법에 토대를 두고 있다. 율법은 완전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법이다. 율법에 흠이 있거나,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으로는 결코 완전하게 지킬 없기 때문에, 율법이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율법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죄의 문제를 바르게 자각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예수께서 대속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법과 공의를 따라 거룩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고 계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을 간과함으로써 복음을 왜곡시킬 있다.

 

 

갈라디아서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이루리라

 

 

어떤 육체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을 없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있을 뿐이다. 절망적인 소식은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 율법을 벗어나게 되면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와 형벌을 받을 밖에 없는 . 그러나, 복음이 좋은 소식인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불이행으로 인한 죄의 모든 저주를 담당하셨고, 율법의 이행을 완성시키셨기에, 우리가 죄의 진노와 형벌로부터, 절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있다는 것이다.

 

율법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 나은 삶을 바라며 복음을 추구하는 신앙 따른다면, 복음을 천국을 위한 보험으로 생각한다면 잘못된 신앙이다.

 

축복이 아니면, 저주다. 복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다. 진정한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면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다. 복음은 보약이나 보험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이지, 나은 삶을 위한 선택사항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한 죄의 진노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신 .

 

하나님의 법은 온전한 .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

 

십자가 대속으로 율법의 마침, 완성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사건, 안에 계시는 분이 살아가는 삶이 바로 복음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른다는 ,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 자신의 삶이 아니라,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의 형통과 축복을 위하여 주여외치며 기도하고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다.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복음을 깨달을 없다. 온전한 구원을 받을 없다. 그리스도의 삶을 없다. 치유의 기적을 맛볼 없다.

 

 

출애굽기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전제로서 의를 행하며, 계명에 귀를 기울여 규례를 지켜야 한다. 내용은 사실 나쁜 소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치유를 받기 위하여는 율법을 완전하게 실행해야 하는데, 이는 인간의 노력과 능력으로는 달성할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의 뿐이다. 구약 시대의 어떤 인간이 말씀을 실제로 실행할 있는가?

 

그러나, 율법의 절망으로 인하여 복음의 귀함과 소중함을, 복음 없이 수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형벌 가운데 두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셔서 죄의 진노를 담당하시고, 율법을 완성시키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셨다. 남은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에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받는 .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 질병, 영원한 사망에게 아이는 가족이야, 하나님의 자녀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로 인해 땅에서 승리할 있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있는 .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자가 당연히 받는 것이 축복이요, 은혜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형통과 축복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바로 기복신앙이며 복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는 ,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이루는 속에서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따르게 되는 . 치유, 기적, 부유함, 높은 신분 모든 것은 나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니라,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일 뿐이다.

 

치유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있는 이유는 계명을 지킬 있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내가 기도하고 헌신하며 봉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죄의 진노와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는 삶이 아니라, 그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헌신과 노력과 충성에 매달리자 말라. 율법의 행위로써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며 십자가만을 바라보라.

 

나의 행위와 노력과 상관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복음을 누리는 삶은 율법을 바르게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을 부인하지 않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지 않기 위하여 예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사는 . 삶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 있다. 십자가 보혈의 넉넉한 능력으로 땅에서 승리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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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5 05:17

그리스도인과 이념논쟁, 복음이냐 이념이냐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말씀시리즈     설교_김형국 목사

06월 21일_그리스도인과 이념논쟁, 복음이냐 이념이냐
06월 28일_그리스도인의 현실인식.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07월 05일_세상 속에서 새 여행을 시작한 사람들- 세례식



그리스도인과 이념논쟁, 복음이냐 이념이냐


서론


목사님들과의 회동에서 듣게된 두 가지 일화. 어느 한 교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한 영향력에 대해서 설교 내용 중에 잠시 다루었을 때에, 예배 중에 몇 분이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걸어나 나가셨던 사건도 있었고, 또 한 교회에서는 서거가 있었던 그 주와 그 다음 주의 설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었는데, 어떤 형제가 헌금봉투에 '한국사회에 이렇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교회에서 이에 대하여 한 말씀도 없어서 저는 교회를 떠납니다'라는 메모를 넣어서 목사님이 우연히 읽으시고 놀랐던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나들목교회에서도 서거 사건에 대해서 설교 시간에 다룬 적이 있었다. 교회에서는 이러한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 다루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좌'나 '우'로 속할 것을 강요하고 그러한 딱지를 붙이는 데에 익숙하다. 한국 교회는 사실 이러한 이념논쟁의 한 가운데에 있다. 여전히 냉전이데올로기는 현대사회 한반도에 남아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한국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한국 기독교와 이데올로기와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이데올로기와 한국 교회

가) 해방 전

● 1919년 3.1 운동 -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생존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 가운데 한국 기독교는 희망이었다. 한국 기독교는 반제국주의 및 민족주의를 신앙적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였다. 독립운동 참여자들 중에 기독교인은 주도적 역할.

● 탈정치적 선교사 -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탄압이 교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자, 미국 선교사들은 민족주의 이념의 영향을 배제하고자 탈정치화 추구. 청년 기독교인이 고민하다가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사회주의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동휘(교회 전도사)와 여운형(신학 공부를 하였음)은 조선 사회주의를 이끌던 사람들이었다. 

● 1925년 조선 공산당 결성 - 조선 공산당은 기독교가 반민족주의라는 이유로 기독교를 반대하기 시작. 이로 인하여 갈등이 촉발되기 시작. 기독교인들을 '일본 앞잡이'라고 하며 살해 및 탄압. 보수 기독인이 이에 반발하여 길선주와 같은 분은 공산주의자들을 '말세의 징조', '사탄'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기독인 박해로 인해 1932년도 (한반도 기독교 대표단체) 조선 예수 연합공의회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공식적으로 반대. 하나님의 뜻에 맞지않는 다는 이유로.


나) 해방 후와 6.25 전쟁 전후

● 김일성 정권 출현 - 친일세력의 청산과 농지개혁을 통해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기독교 60%가 북쪽에 거주. 토지개혁을 이유로 토지를 박탈하고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기 시작하여 윤하영, 한경직 목사님을 중심으로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결성하여 정치적으로 저항하려고 했으나 와해되고 말았다. 해방 후 3년동안 신앙으로 인한 박해, 계속적인 저항으로 박해를 받다가 기독교인들이 대거 월남하게 됨.

● 기독교인 대거 월남
북쪽 지역의 20여만 명의 신자 중에 7~10만명이 월남하게 된다. 북쪽에서 토지가 박탈되고, 투옥과 죽음을 경험한 상태에서 월남을 하게 된 것이다. 북한의 공산주의가 유물론을 기초로 하며, 종교는 아편이라는 무신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서 박해를 가했기 때문에 월남 기독교인들 눈에는 북한 공산당은 사탄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었다.  

● 반공 친미의 이승만 정권
남쪽에서는 신탁문제가 있었다. 남과 북이 각자 정부를 세울 것이냐의 논의도 있었다. 중도 우파 또는 중도 좌파들은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려고 했지만, 남쪽의 기독인들은 그들이 공산주의의 실제를 알지못하는 무지 속에 있다고 여겨서 이러한 움직임을 배제하고 남한만의 이승만 정권을 설립.

● 6.25 전쟁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손양원 목사님 순교. 공산주의에 의하여 거의 박멸되다시피 되었다.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철학적 사유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오늘날까지도 북한 공산주의는 '악마', '사탄'으로 이해되고 있다.

● 전쟁 후 미국의 막대한 원조 물자
1950~1954년간 미국 장로회선교회, 감리교를 통해 막대한 원조 물자가 한국에 공급되었다. 이로 인해 남한의 기독교인들은 북한 공산주의로부터는 생명의 위협을 경험한 반면에, 미국으로부터 한국사회의 재건에 필요한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을 매우 우호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


다) 군사독재 시절부터 현재

● 군사독재 시절 -  군사독재를 한국 기독교가 용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군사독재가 공산주의보다는 낫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빨갱이를 막는 군사독재를 지원하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조찬기도회를 통해 군사정권을 축복했다.

옛 세대들이 '빨갱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그냥 가볍게만 여길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민주화 운동은 용공적이라고 정부가 탄압하였다. 수많은 간첩단 사건이 있었지만, 그 중에 적지 않은 사건들은 조작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반공주의는 거의 신앙의 수준으로 내재화되기 시작한다. 진보진영이 반공주의를 극복해보고자 하였으나 한국 교회에서 소수였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힘.


● 민주화 시절 

그러나  더 큰 혼란이 있었다. 90년대 공산주의 몰락후 냉전 이데올로기는 해체되고 있었으며 민족주의가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 남북대화 및 화해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반공주의에 물들어있던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현실을 수용하기 힘들었다. 이 상황을 공산주의가 다시 적화통일을 꾀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강인철 "반공주의가 사회 전체적으로 해체되는 수순을 밟고 있었으나 오히려 이 시기에 개신교 반공주의가 더 강화됨."

"한국 보수 기독교는 평화통일 보다는 멸공통일에 더 익숙하고, 평화 공존보다는 흡수 통일을 더 선호하며, 화해 협력보다는 고립 붕괴를 무의식적으로 희망하는 경향을 갖는 전투적 유신론에 입각한 기독교적 승리주의, 힘에 의한 통일론, 혹은 증오의 영성에 더 깊이 고착되어 있다." (이문식, 한국교회의 평화의 영성에 대하여, 5)


● 2000년 이후 정치세력의 움직임

극보수적인 지도자들이 한국사회가 좌파에 의하여 적화통일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조성하면서 교회를 좌우의 이념갈등에 아주 적절한 일꾼으로, 전략적 그룹으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조갑제. 

조갑제 (극우 보수 언론인) "그래도 한국에는 잘 조직된 거대한 반공 보루가 있습니다. 전인구의 30%나 되는 개신교 세력과 약 70만명을 헤아리는 군대가 있다" (2000, 자신의 홈피)

조갑제는 기독교 궐기론을 주장, 2003년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의 주요 인물로 등장, 3.1절 친북반미좌파 종식국민대회 등을 중심으로 보수 기독교인들을 결집. 

2000년도에는 보수 기독교인들을 정치적으로 선동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반대편에서는 진보주의자들이 "예수는 사회주의자였다"라는 단순논리를 들고 나왔다. 이들의 영향은 크지는 않았다. 

이러한 대립이 바로 현재 한국사회의 자화상이다.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시청 앞에 모여 '반북,친미'를 외치고 있는 한국교회의 슬픈 모습이 위와 같은 연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대통령이 '좌파 대통령이다'라고 하면 교회는 더 이상의 고민없이 자연스럽게 그를 '악마'로 이해한다. '공산주의자다', '사회주의자다', '좌파다' 라고 하면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한다.



2. 이데올로기의 성격


가) '이데올로기'의 어원 - 계몽주의 시대에 출현
1789 프랑스 혁명

나) '이데올로기'의 뜻
이데올로기는 '철학'과 같은 뜻이 아니다. 철학은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 등을 사유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데올로기는 비판적 사유를 넘어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그것에 헌신하고 행동하는 것을 요구한다.

다) '이데올로기'의 성격

이데올로기 자체가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우트바르트(Gooudzwaard), 현대 우상 이데올로기 (Idols of ou Time), IVP, 26-28
(1) 세워 놓은 목표가 비상한 중요성을 갖는다. - 고상하고 선명한 목표 "이렇게 하면 잘 살게 된다"
(2) 수단이 전혀 제약 없이 활동한다. - 목적을 위한 모든 수단이 정당화된다
(3) 목적이 참된 가치 기준과 규범을 왜곡시킨다. - 목적의 중요성 앞에 선한 규범이 목적을 중심으로 재편성된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기본적 권리들이 재해석 된다.
(4) 목적은 새로운 수단들이 제시하는 법률에 적응할 것을 요구한다.
(5) 목적이 자체의 거짓원수를 만들어낸다. (윗책, 26~27) - 이 목적에 따라오지 않는 자는 '적'일 뿐이다. 반동분자를 창출. 여기서 증오의 태도가 나온다. 그러한 반동자를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종교의 대체물이며, 그 시작부터 마귀적인 것이다" (윗책, 20) - 이데올로기를 통해 세상을 보게된다. 하나님이 할 일을 이데올로기가 대신하게 된다. 한국 교회는 본래 하나님만을 섬기는 교회였는데, 이데올로기가 들어오면서 우파나 좌파이든 이데올로기가 하나님처럼 여겨지게 되고 증오 감정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나님과 이데올로기를 겸하여 섬기는 한국교회. 문화 속에 스며든 이데올로기를 자기 사유과정 속에서 무조건적으로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


3. 무엇이 '우리'를 규정짓는가?

갈 3:26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27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8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가) 1세기 교회의 문제와 우리의 문제

(1) 1세기 교회의 문제는 유대인과 나머지 사람들간의 관계가 주된 문제였다. 

롬 9~11장 유대인 예수와 헬라인이 수용되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유대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민족문제.

고대 경제를 지탱하던 노예제도였는데, 이렇나 계급문제, 남녀차별의 문제가 있었다. 그 시대는 그러한 차별문제가 인식되지도 않을 정도로 남자 중심주의였다. 고대 사회는 여자를 인간의 레벨로 올려놓지 않았다.


(2) 오늘날 우리의 문제
① 다민족사회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준비 안 된 한국 교회 
② 노예제도는 없지만 경제적 양극화와 그로 인한 대물림. 
③ 양성평등 문제 
④ 좌와 우의 이념갈등


나) 복음의 우월성 

바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다"
좌파이든, 우파이든, 경제적 지위가 어떠하든 자기를 규정하는 우월적 기준이 복음이 되어야 한다. 바로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 우리를 규정하는 세가지
(1) 우리는 죄인이었고 지금도 죄성(자기 중심주의)를 가지고 있다.
(2)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을  믿어 그리스도께 속한다. 세례를 받는 의미. 그리스도와 하나된다는 의미
(3) 이제는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리스도로 옷입게 되었다. 우리의 추잡한 것이 덮혀졌다.


따라서 복음은 무엇보다도 우월하다. 복음주의자는 이제 이데올로기를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다) "복음을 가진 자의 삶을 위한 7가지 가이드 라인"

(1) 상대방이 거짓 원수/ 적이라는 속임수에서 벗어난다.
내 속에서 적개심과 분노가 일어날 때 빨간불이 켜져야 한다. 이를 경계하라. 옳으니까 의분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전혀 관계없는 문제에서 비롯된 분노가 이슈 한 가지를 통해서 표출되는 경우일 수 있다. 적개심을 경계하라.

(2) 상대방을 형제로서 이해한다.
우리가 아무리 달라도 형제이다. 
나는 남자이지만 여자를 이해하려고 하고, 자유인은 종을, 우파는 좌파를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나 우리나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결국 그는 내 형제이기 때문이다.

(3) 하늘가족을 이해하는 것을 통하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자세의 부족함을 보완한다.
세상은 복잡하다. 나의 이해는 제한적이고 파편적이다. 따라서 겸손함과 자기부인이 필요하다. 자기오류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에 해당한다. 토론하는 사람 중에서 기본적인 준비와 공부를 하지 않고 토론하는 경우가 있는데, 옳지 않다.

(4) 하늘가족과 대화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좀 더 바르게 이해한다.
세상은 좌우로 분리해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언론의 경우, 좌나 우로 편향된 기사를 다루는 언론들이 있다. 세상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잘못하면 이러한 언론에 의하여 집단적으로 조작될 수 있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에 의하여 조작되는 것을 용납해서야 되겠는가. 따라서 세상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를 나는 반대해, 나는 찬성해"라고만 하면, 여러분은 초등학생인가? 대안은 고민하지 않는가? 정답을 당장 찾지는 못하겠지만 좀 더 공부해야 한다.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보완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강점이다.

(5)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오늘날 깨어진 세상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더욱 온전히 발견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민과 이 시대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는 지를 분별해야 한다.

(6)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자유와 판단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소수자의 의사표현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침묵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나와 의견이 다르거나 심지어 잘못된 내용의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7) 하나님의 뜻으로 분별된 일일 경우, 교회 공동체에서 합의되지 않았다면, 각 개인이나 작은 그룹이 믿음으로 행동하고 교회 공동체는 이를 존중한다. 다양한 목소리와 그룹이 존재하는 곳이 교회이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념에 대한 우월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결론: 우리 한국 교회 업그레이드!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 교회는 슬픈 아픔이 있다. 반공주의라는 이념이 논리적이지 않으나 정서적으로 박혀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머리 껍데기가 벗겨지고 탄압받았기 때문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다는 것은 이해해야 한다.

뼈속 깊이 남아있는 슬픔과 고통이 있지만, 그 아픔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치유하여야 한다. 그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크신 우리를 붙들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행동해야 한다.

나들목 교인들이 수많은 이슈들과 문제들 앞에서 사람들을 포용하고 중심을 잃지 않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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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9 08:20

상황을 뛰어넘는 복음의 생명력

상황을 뛰어넘는 복음의 생명력


 

1. 실종된 복음의 능력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 참된 구원을 이루신다는 귀한 소식입니다. 복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유앙겔리온(euanggellion)”으로서 전쟁의 승리를 전하는 메세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복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승리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와 세상 가운데에 이러한 복음의 귀한 열매, 영생의 열매와 무관한 메마른 삶을 살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을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승리가 실종된 현실입니다.



복음을 외쳐 부르며 찬양의 감동이 흐른다고 하는 교회 공동체의 오늘의 현실을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상한 자존감, 하나님에 대한 무너진 신뢰, 인간관계 속에서의 상처에 대한 두려움, 신앙 생활의 생명력과 기쁨의 상실, 잠깐의 뜨거운 감동 뒤에 따르는 허탈함, 방황, 두려움과 낮은 자존감을 감추는 가식, 낮은 자존감으로 인하여 열등감을 느끼게 되는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과 부끄러움 등 복음이 죽어있는 현실을 목격하게 됩니다. 복음의 모양은 있지만, 그 생명력은 이미 불이 꺼져버린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복음의 위대한 능력의 실존과 참된 기쁨과 생명이 사그러져가는 신앙의 현실간의 괴리는 무척이나 혼란스럽스럽고 때로는 이러한 사실을 직접 대면하기조차 두렵습니다.



위대한 복음의 비밀한 능력을 나를 비롯한 믿는 자들의 생명과 삶, 그리고 이 세상에 흘러넘치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널리 선포하기 위해 어떠한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2. 문제의 본질: 깨어진 하나님과의 신뢰관계



흔히, 무너져버린 또는 흔들리는 신앙 생활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기초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 기초의 회복은 복음의 능력과 은혜 회복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 회복의 내용이 단순히 “경건의 모양”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문제의 뿌리를 근절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단순히 QT 시간을 다시 확보하기, 꾸준히 기도하는 시간 마련하기, 교회 예배에 더 열심히 참여하고, 주 중에도 예배와 찬양시간에 더 자주 참여하기 등 신앙의 모양을 재정비하는 방법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본질을 두드려 보고 진단하는 것이 가장 최우선 되어야 할 과제입니다. 내 안에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있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손상되고 상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을 가장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상함을 치유받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내 안에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에 주목하여 귀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고요한 묵상을 통해 나의 내면의 심연 속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충만하신 사랑과 은혜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믿음과 신뢰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본래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복음의 참된 능력은 하나님에 대한 회복된 신뢰를 기초로 하여 드러나는 것입니다.




 

3. 상황을 넘어서는 복음의 생명력



또한 우리는 날마다 다양한 상황과 씨름하게 됩니다. 특히 힘든 고난이나 환란을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 또는 배신감으로 인해 믿음과 신뢰가 깨어질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복음의 능력도 드러나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상황 가운데에 승리하는 비결은 그 상황에 대하여 원망이나 불만을 품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범사에 감사함에 실패하는 것)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믿음에 있습니다.



모든 고난(trial and test)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 말미암아 허락된 연단의 시간이요,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입니다. 이 때는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 보다도 우리의 믿음의 역량에 높이 기대를 하시는 때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귀한 기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믿음을 지켜 나아가는 자에게 복음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복음의 참된 생명력은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지배당하지 않는 생명력에 있고, 폭풍우가 닥쳐와도 그 폭풍우에 쓸려가는 것이 아니라 바다 위를 걷는 권능에서 드러납니다.


 

(고린도후서 4: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마태복음 14:24~25, 28~29)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러한 복음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한계를 결정하는 ‘죽음’이라는 상황을 당신의 육신으로 다 받아내셨고 그 상황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오히려 그와 같은 상황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셨습니다. 부활을 통해 죽음에 대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화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는 의지적 믿음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절망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께 물으셨습니다. “아버지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상황이 변화되지 않은 동일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는 믿음의 고백을 이루십니다. “당신의 뜻을 다 이루었나이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 이후에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상황에 묶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여 상황의 지배를 받지 않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며 세밀하신 통치를 모든 상황 가운데 인정하고 그 모든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신뢰하고 부인하지 않는 믿음을 통해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고백은 그렇게도 귀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만이 복음의 능력을 우리의 모든 삶과 생명, 그리고 이 세상 가운데 흘러넘치게 할 수 있고, 그러한 능력은 이 땅위의 모든 상황을 뛰어넘는 위대한 능력인 것입니다.


 

(로마서 6:4~6)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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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8 05:00

이념 갈등의 어둠을 깨고 복음의 새벽을 밝히는 변혁자

이념 갈등의 어둠을 깨고 복음의 새벽을 밝히는 변혁자



1. 들어가면서



대한민국의 정치와 사회를 분열의 장으로 형성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보수와 진보간의 이념 대립입니다. 이러한 대립은 다양성의 일면으로서 아름답게 한 사회의 정치가 계속해서 성장하도록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름이 상호작용을 통해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반목과 시비 가운데 서로의 발목을 붙잡고 오히려 한국 시민사회의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큰 도전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북한'이라는 문제를 놓고도,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놓지만, 타협이나 합의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기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과 도전을 직면하여 단념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허락하신 통일과 평화를 향한 부르심에 포기하거나 불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통일과 이 땅의 부흥을 소망하지만, 이 작은 땅덩어리 안에서조차 화합과 소통을 이루는 역량이 부족한 이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과연 어떠한 소망을 품으실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민족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 크신 자비 가운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광야에 버려진 상황 속에 처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 곳에서 건져내어 주시고 더욱 풍요롭게 먹이시고 이 날까지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지난 과거의 대한민국 사회는 진보와 보수간의 갈등 속에서 엄청난 내홍을 경험해왔지만, 그 역사 속에서 살아계셨던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신뢰하는 자로서 인간의 모든 지식과 지혜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붙들고 그 위대함을 거침없이 외쳤던 바울의 고백에 마음을 집중해보고자 합니다.



"진보가 옳다" 또는 "보수가 옳다"라는 입장 중에서 어느 한 편에 설 것인가를 고민하기에 앞서 또는 그러한 이념의 스펙트럼 속에서 이미 자신의 입지를 가지고 있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높은 자가 아니요,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통치자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능력의 우위를 인정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어떠한 사상과 지식, 지혜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이 귀하고 위대하다는 인식을 온전하게 정립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애통하는 마음'과 '자기 성찰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아래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2. 변혁자로 바로 서기 위하여



(1) 치유되지 않은 마음은 이 세상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정치의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한 시야가 열리게 되거나 직접 경험하게 되면서 받게 되는 마음의 충격과 상처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 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상함을 받고 고통에 빠져 지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희망을 품어왔고 기대감을 가져왔던 사회에 대한 환멸과 실망으로 인해 마음 깊은 곳이 상함으로 깊게 베어버리고만 영혼들.



그러한 영혼에게 관찰될 수 있는 문제는 그 상함이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은체 자신이 믿기 원하고 붙들기 원하는 신념과 가치체계를 합리적인 이유없이 고집하는 집착과 편향적 사고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처입은 영혼은 그 상처가 회복되고 치유되지 않는 한 자기보호적인 심리가 매우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한 심리적인 경향성 때문에 두 가지 문제를 드러내게 됩니다.



첫째, 문제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에 있어서 자기 중심적인 해석에 치우치게 됩니다. 그 결과는 객관성과 합리성의 상실입니다.



둘째, 자신의 의견과 관점을 수용하지 않는 상대방을 정죄합니다.



자기보호적 심리로 인해서 자기 중심적 해석에 치우치게 될 뿐만 아니라 손상된 자신의 자존감을 어떻게 해서든 보상받거나 메꾸고 싶은 심리로 인하여 자신의 의견과 다른 생각과 의견을 표명하는 상대방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상대방으로부터 (이미 손상된 마음으로 인하여 더욱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에서) 마음에 상함을 더욱 쉽게 받게 되고, 상대방으로부터의 거부감으로 스스로 더욱 괴로워 하고, 자기 방어를 위해 상대방에 대한 공격적 언행을 드러내는 점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온유의 상실'입니다.



지금까지 정리하고 있는 내용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무너진 현실의 모습을 목격하고 상함받은 영혼을 정죄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마음이 상하게 되는 상황을 허락하신 깊은 뜻을 좀 더 헤아려보고자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하여 제안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상한 마음"입니다.



상처입은 영혼은 치유되지 못하고 그 상함을 품고있는 한, 그리고 마음이 상한 만큼,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여전히 거룩한 뜻을 품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도,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을 온전히 품을 수도 없습니다. 그 상함이 하나님 부재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상처입은 영혼은 먼저 자신의 상함을 치유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새롭게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격을 더욱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시각과 관점이 아니라, 또한 자신의 사상과 지식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 땅을 향하여 슬피 울고 계시며 안타까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내 안에서 온전히 회복하여야 합니다.



나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시대를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죄인되었을 때, 그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하여 당신의 아들을 이 땅의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셨던 하나님, 아바 아버지께서 여전히 이 시대를 슬퍼하시며 긍휼을 베푸시고자 하시는, 그 마음을 품어야 비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시대를 향하여 온전히 열린 지혜와 시야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앙적 신념은 이렇습니다. "자기 안에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마음과 통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않은 자는 자신이 속한 세계와 사회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 내부에서 행하시는 것과 세상에서 하시는 것은 결국에는 같은 일이다 - 짐윌리스]



(2) 자기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점에 대해서 "그 근거가 과연 합리적이고 타당한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비판적 성찰은 자기학대나 자기비하가 아닌,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스스로 경계하여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상대방에게 잘못된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입니다.



또한 끊임없이 변해가는 상황과 현실 속에서 유한한 존재인 사람으로서 상황에 대하여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며, 모든 상황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생각과 이해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인간됨을 마음에 새겨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행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자기 성찰적 태도를 통해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상함으로 인한 내면의 문제점'은 없는지 또는 성급함으로 인한 오류는 없었는지 등을 확인하고 점검하여 생각과 판단의 문제점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고자 하는 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자기 비판적 성찰은 "회개"와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사울왕과 다윗이 매우 상반되는 태도를 보이는 예가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정리했던 내용이 있습니다만, 이 곳에 올려서 나누고자 합니다.



 

사울 vs 다윗 (나의 기준 vs 하나님의 기준)

 

 

회개는 ‘진실에의 헌신’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크리스찬이 직면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현실을 얼마나 민감하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크고 높으심을 이해할 수 있는 영역으로 나아가게 된다.

 

회개는 자신의 정체성과 현재의 모습이 죄의 부패한 본성이 만연해있다는 현실을 성령의 조명 (illumination)을 통해 직시하는 것이고, 나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준으로 죄의 문제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나의 죄의 문제를 내가 알지 못하는 가장 깊은 부분까지 알고 계신다.

 

자신의 죄의 문제를 끊임없이 찾아내어 하나님께 고백하고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진실에 헌신하는 태도”이다.

 

이런 점에서 사울왕과 다윗은 매우 상반된 태도를 나타내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호와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그러나 사울은 이 명령을 철저하게 지키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보내셔서 사울을 책망하실 때에 사울은 “변명” (자기합리화)을 내세웠다. (자기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기를) 전쟁의 노략물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서 그와 같이 행동하였다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하였다. (사무엘상 15: 1~22)

 

하나님의 기준을 자신의 기준에 따라 적절하게 재해석 한 결과이다.

 

반면에 다윗이 타인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취하고 난 뒤에 선지자 나단을 만나서 취한 행동은 매우 상반된다.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이었던 우리아까지 살해하는 행위를 할 때, 다윗은 자신의 마음의 지도에 비추어 볼 때,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마음의 지도는 현실의 진실에 대하여 닫혀있었다. 그러나 선지자 나단이 그의 죄를 책망하자, 다윗은 한 치의 변명도 없이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 자신의 기준보다 하나님의 기준의 절대적 우위성을 인정한 결과이다. (사무엘하 12: 9~13)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진실에 부합하는 태도는 회개하는 태도이다. 회개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의 회복이며 이러한 회복은 상황과 문제에 직면하여서 우리가 반응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 된는 것이다.

 


자기 비판적 성찰은 사실, 혼자만의 힘으로 감당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생각의 틀을 벗어나서 객관적으로 그 생각을 판단하거나 제 3 자의 입장에서 고민하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 비판적 성찰을 다른 사람의 도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합리적 토론과 논쟁입니다. 토론과 논쟁은 때로는 격렬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고, 사소한 부분을 가지고 다투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결코 "싸움"이나 "전쟁"이 아닙니다. 싸움이나 전쟁은 상대방을 죽이고 해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논쟁과 토론은 인간의 사고와 판단의 부족함을 서로의 도움을 통해 해결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논리성과 합리성, 객관성을 더욱 온전하게 하기 위한 논쟁과 토론은 싸움과 전쟁을 위한 "칼"이 아니요, 생각의 부족함과 오류를 찾아내어 이를 제거하기 위한 수술용 "메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용의 결과로 메스가 칼로 사용될 수 있는 위험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3. 정리



저는 국제법 전공자입니다. 학문적으로나 개인적 신념으로나 관심을 가지고 고민해왔던 점은 이 한반도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좀 더 넓고 멀리보는 시야에서 바라볼 수 있느냐였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한반도의 남북관계, 동북아시아, 냉전체제, 그리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간의 정치적 권력 경쟁, 지구화(globalization)이라는 총체적 환경.



대한민국 사회의 보수와 진보간의 갈등도 이러한 넓은 맥락에서 관찰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진보적인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그 단체의 활동을 통해서 국내문제와 국제문제를 살펴보았던 경험도 있고, 지금은 보수적인 집단을 통해서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문제와 상황을 관찰해왔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느낀 점은 '보수'나 '진보'는 모두 그 자체적으로는 강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으로는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생각을 정리해내지 못합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생각의 틀, 그 안에서는 너무나도 온전하고 강해보입니다만,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에는 두 진영 모두 약할 뿐입니다.



보수나 진보라는 이념에 있어서, 각 이념에 따른 진리가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전체적으로는 맞지 않거나 그 전체를 감싸안을 수 없는 진리일 수도 있고, 전체를 설명하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보수나 진보라는 이념적 스펙트럼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나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세상 전부를 다 이해한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보수는 진보적 고려와 고민, 상호작용을 통해서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진보도 또한 보수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사고의 틀을 확대해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그나마 인간의 지혜로 다 헤아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진리에 접근해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나의 보수가 옳다" 또는 "내가 속한 진보가 옳다"라고 주장하는 자의 마음 속에 과연 어느 한 쪽의 이념 스펙트럼에 속한 자로서 만족과 안위를 느끼는데에 동기가 있는 지, 진정 모든 세상을 감싸안으시는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를 이해하고 구하고자 동기를 품고 나의 생각의 틀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그 동기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생명과 삶의 길이 열리기를 소망하는 한국 기독인이 자기 만족적 동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하며 이 세상의 진정한 변혁자로 거듭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자기 자신의 이념적 입지의 '완벽무결함'에 대한 신념은 양보하되, 온전한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신념을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변혁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를 내 안에 먼저 이루고, 비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세상을 변혁시키는 역할을 감당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이념갈등의 어둠을 깨어내고 하나님 나라의 새벽을 밝히는 변혁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자녀가 될 수 있기를 또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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