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17 17:03

기독교에 관한 소론(小論) (1) - 신(神), 인간(人間), 그리고 죄(罪)



I. 들어가면서


한국에는 주류 종교로서 기독교 외에, 불교와 천주교가 있다. 나는 기독교인이나, 다른 종교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열린 마음’이란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생각과 인격을 그 사람의 인격적, 존재적 가치로 인정하여 존중하며, 무엇보다도 그 사람의 생각과 신념을 경청하여 들을 수 있는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나와는 다른 종교적 신념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존중하여 경청하며, 그 생각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를 의미하는 한국 기독교(Protestant)에 관한 성경적 논제에 관하여 간결하게 생각을 정리해보는 글이다. 이 글은 누군가를 설득하고자 하는 글은 아니다. 기독교의 성경적 진리와 가치에 대하여 마음(관심)과 생각의 편린은 있으나, 그에 관한 혼동과 편견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다. 다만 소론(小論)의 단계에 해당하는 글로서, 차후 완결될 글로 향하는 중간단계의 성격이 강하며, 의문과 질문을 제시하며, 그것에 대한 답을 구하되, 때로는 그 답이 완결되지 않거나, 새로운 질의로 나아갈 수 있다.


부족하고 완결성이 미약한 글이나, 내 자신의 신앙적 신념에 대한 겸손하고 솔직한 나눔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다.


II.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은 하나님께 구속과 제약을 받는 존재인가?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과정, 그 창조의 목적과 의미를 간결하게 요약하자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다. ‘자기 형상’,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당신의 손으로 친히 만지셔서 지으셨으며 당신의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명이 있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 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고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그리고 다른 존재를 통해서 지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의 손길로 직접 지으시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과 닮은 존재인 것이다.


과연, 하나님은 지배와 구속, 통제의 목적을 위하여 당신과 유일하게 닮고, 그 존재적, 생명적 특질(이미지 형상과 생명)을 공유하는 인간을 창조하셨을까? 하나님과 동질의 이미지와 생명력을 부여받은 존재의 생명이 살아가는 삶이, 그 하나님의 구속과 제약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이겠는가?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생육’, ‘번성’, ‘정복’, ‘통치’라는 존재의 목적을 부여해주셨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자유자’로서의 존재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단적으로 간결하게 요약하자면, 부모님과 자녀의 관계로 정리될 수 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 그리고 자녀는 부모로부터 생명적 특질(이미지 형상과 생명)을 부여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동식물의 창조에 관하여 성경에는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라고 나온다. 그리고 창조된 동식물에게도 '생육'과 '번성'을 (정복과 통치는 아니다) 창조의 목적으로 부여하셨다.)


III. 죄론(罪論)


1. 죄의 의미에 관하여


죄(sin)의 원어적 의미는 ‘과녁에서 벗어남’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대한 반항 또는 저항이라는 적극적 의미보다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죄는 ‘원죄’와 ‘실행죄’로 분류된다. 원죄는 선악과 사건에서 비롯된 아담과 하와의 범죄이며, 실행죄는 원죄에서 비롯된 죄성이 아담과 하와의 후손에 잔재하여 파생되는 인간의 모든 범죄를 의미한다. 원죄 사건인 선악과 사건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했던 사건이 아니라, 뱀으로 인한 죄의 유혹에 빠지게 된 사건이다. 실행죄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형인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살해한 죄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분노로 추동되어 무죄한 다른 인간(그것도 혈육)을 살해한 사건이다.


2. 죄의식에 관하여: 인간의 원죄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와 분노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정죄와 죄의식 아래에 놓이며, 인간은 죄의식으로 고통받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는가?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하나님을 대면하기 이전에, 이미 수치심을 느끼며 하나님을 “두려워” (창세기 3:10 아담의 고백)하며,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로” 숨었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숨어있던 현장에서 하나님께 발각되었다. ’수치심’과 ‘두려움’은 죄의식의 심리적 현상이다. 아담이 하나님을 대면하기 이전에 이미 죄의식이 발생하여, 이로부터 비롯된 심리와 행동의 특성이 나타나고 있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림으로써 범한 죄로 인한 수치심과 두려움은 이미 인간의 내면에 형성되어 있던 인격적인 반응이었다.


원죄로 인한 결과로서,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하셨고, 에덴 동산에서 인간을 쫓아 내셨다.” 사실은 아니다. 이 내용은 그 절반만이 진실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노동의 수고와  임신과 출산의 짐을 부여하셨으며 에덴 동산에서 인간을 쫓아 내셨던 것은 맞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는 원죄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저주’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원죄로 인하여 ‘저주’(“curse”)를 받은 것은 인간이 아니라, 죄의 유혹을 꾀했던 ’뱀’과 선악과가 심겨 있었던 ‘땅’ 뿐이었다. 인간은 저주의 대상으로 지명되지 않았다. 또한, 하나님의 존재의 특질 (당신의 이미지 형상과 생명)을 박탈하지도 않으셨다. 단지, 삶의 환경과 조건이 변경되었을 뿐이다.


지나치기 쉽지만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가지는 한 가지 사건이 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나서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부끄럽게 여겨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자신들의 신체를 가렸다. 하나님은 원죄를 범한 이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무화과나무 잎 대신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보호하셨다. 이 작은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은 인간의 상한 마음을 이해하셨고, 그 마음을 품어 보호해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지었으므로, 그 대가로서 당연히 죄의식의 고통을 짊어지고 고통받아야 한다’고 하는 정죄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인간을 저주하고 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3. 구원에 관하여


죄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또한 그 존재성은 성령과 함께 성부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삼위일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죄의 구원의 문제를 위하여 당신 스스로의 희생을 치루셨던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의 문제의 해결과 구원을 얻는다. 죄의 문제와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의 해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한 가지 빠지기 쉬운 편견은 인생에서의 고난과 사고, 그리고 때로는 그로 인한 죽음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의 표출 또는 심판이라는 생각이다. 이는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 즉 기독교 구원론에서 벗어나는 생각이다. 인간의 죄의 문제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방안 또는 해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죽었다.”


하늘의 보좌로부터 이 땅에 내려오신 신은 죽었다. 오직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죽음의 희생 이외에, 그 이상의 대체할 수 있는 해답, 그보다 귀한 대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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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0 07:48

"내 안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 권율의 세바시 강연을 듣고

"내 안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 권율의 세바시 강연을 듣고



1. 들어가면서

 


권율이라는 사람은 미국 사회에서 매우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했고, 구글과 맥킨지 등의 글로벌 기업에서 근무했으며, 2006년 미 CBS의 대형 리얼리티쇼 '서바이버'의 우승자로서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인의 가능성을 대중적으로 크게 각인시켰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인물이 두려움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한국인 동포, 특히 한국 청소년들과 청년들 앞에 섰습니다. 그가 세바시 강연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무엇일까요? 이를 재해석해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일단 동영상을 보시고 다음 내용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동영상의 소요시간은 16분 34초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동영상의 해석 자막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어 강연을 의역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 과거의 나현재의 나의 장애물인가?

 


권율은 대중들이 자신을 항상 성공해왔고, 천성적인 리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자신의 과거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미국사회에서 소수인종으로서 경험해야 했던 인종차별과 학교 폭력으로 인해 심각한 심리적 장애, 우울증, 고립감, 다한증, 공황장애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과거의 자신을 벗어내고 마침내 나는 매일 진화한다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나는 어떠했습니까? 어린 시절로부터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기간 동안 누구나 대인관계 속에서 많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어린 시절은 그러한 기억조차 명확하게 남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 좌절감과 낙심을 경험하게 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과정 중에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이거나 패배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거나 패배(포기) 심리가 자연스럽게 마음의 중심에 고착되어, 자기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사전에 심리적으로 차단하는 성향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권율이 언급한 그 자살한 형은 자신의 상황이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으로 인해 외로움과 절망감에 빠져있었고,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자존감의 상실로 결국 자살을 택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정도가 자살동기 또는 자살충동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우리에게 자존감 또는 자아긍정적 심리가 어느 정도 심각하게 결여된다면, 상당한 정도의 자기 파괴적인 심리가 내면에 자리잡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파괴적 심리는 공격적 성향이 표출된다면, 자신이나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자존감이나 자아긍정적 심리가 결여된 사람이 열등감을 경험하게 된다면, 그러한 열등감을 경험하게 한 타인에 대해서 피해를 주거나 정신적 고통을 가함으로써 자기 파괴적 심리를 외부로 표출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3. <결단의 순간>이 필요하다

 

 

권율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계속 이렇게 살 것인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그는 자신의 앞에 두 가지 선택이 놓여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무능력하고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삶을 그대로 살아가던지, 아니면 두려움에 맞서서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권율이 덧붙여 고백했던 것과 같이, 옛 사람 또는 과가의 나를 변화시키겠다는 결정과 시도는 감정적으로는 저항감을 느끼게 되는 매우 힘든 결정입니다. 왜냐하면, 도전이란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을 시도하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시행 가운데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습니다. 일단 결단을 하면, 전략이 보입니다.

 

 

4. Baby Steps를 취하라

 

 

과거의 나를 변화시키는 도전,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 우선 무엇을 변화시킬 것인가, 다시 말해서 롤모델과 장기적인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상당히 부담감이 크고, 규모가 큰 목표일 것입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율권은 네 가지 전략을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첫째, Baby steps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장기적인 목표를 작은 성장을 위한, 부담스럽지 않은 단기적 목표로 분해해서 차근차근 실행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자신과의 약속과 규칙(rule)을 설정하여, 이를 실천합니다.

 

셋째, Self-Permission to Fail

 

넷째, Self-Motivation

 

 

이러한 작은 도전의 실행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작지만 소중한 점진적인 변화입니다. 때로는 실패를 경험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삶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권율은 스스로에게 약간의 여유를 허용했습니다. 그것은 self-permission to fail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에게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심리적인 여유를 허락한 것입니다. 결과에 연연하기 보다는 도전했는지의 여부에 중점을 두고 판단을 했습니다. 또한 권율은 이성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힘들어 했었는데, 이에 대하여 자기 자신만의 동기부여 요인을 생각해냈습니다. 그것은 대화도 못하면서 평생 총각으로 살지는 말자라는 것입니다.

 

 

5. 자신감은 경험적 지식이다

 

자신감은 태어나면서 기질적으로, 천성적으로 또는 우연에 따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까?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권율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감도 경험적 지식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변화를 위한 작은 도전들을 시행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시도할수록 부담감과 두려움이 더 약화되고, 숙련되게 된다는 것과 여러 번 성공이 축적되면서 진정한 자신감을 갖게 되며, 나아가 한 때 의지했던 자기 자신과의 약속 또는 규칙에도 의존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공은 자신감을, 자신감은 성공을이라는 선순환 공식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6. 글을 마치면서

 

미국 사회에서 소수인종으로서 경험해야 했던 율권의 고통과 경험은 특수한 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예외적인 상황은 아니며, 또한 그 정도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어도,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은 자존감과 자의식에 깊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자기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의 나의 옛 모습, 습관과 사고방식이 현재의 내가 발전하는 데에 장애가 된다면, 결단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선택하고, 도전해야 합니다. 물러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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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7 20:11

추천하는 신앙서적

제가 많은 신앙서적을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동안 읽었던 몇 권의 신앙서들은 저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 매우 귀한 책들로 기억됩니다. 성경 말씀은 신앙의 기초요 기본인데, 이러한 신앙서들은 그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돕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무릎꿇는 그리스도인 (앨버트 리차드슨, Albert Richardson)



이 책의 제목은 원래 ‘무명의 무릎꿇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저자가 밝혀지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신앙인들에게 깊은 감명과 지혜를 제공한 책으로서, 특히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은혜로운 교제에 관하여 깊이있는 마음의 시야를 열어준 책입니다. 차후에 저자가 밝혀졌습니다.

이 책은 제가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군에 입대하기 전에 신앙서적을 하나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신앙을 위한 좋은 책을 하나 잘 고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는 내용으로 기도를 드리고, 강변역 두란노 서점에 잠시 들렸습니다. (지금도 이 서점이 있는 지 모르겠네요) 우연히 이 책을 집어들었다가, 그 내용을 잠시 훑어보고 금방 반해버렸습니다. 한 줄, 한 줄의 내용이 너무나도 귀하게 느껴져서 밑줄을 치면서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책은 제가 크리스찬이 된 이후, 성경 다음으로 읽었던 신앙서로서 저의 신앙의 기초를 다져준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습니다. 네이버 블로그 서평 하나 (링크)




내려놓음 (이용규 선교사)



하버드 출신의 몽골 선교사로서 알려지신 이용규 선교사님은 ‘내려놓음'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경적이고, 올바른 방법을 제시합니다. ‘내려놓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첫걸음’이나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나아가는 것'의 의미는 매우 막연하게 느껴지고,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명확하게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는 믿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일상의 삶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를 알지 못하는 크리스찬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이용규 선교사님의 선교사역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내려놓음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용규 선교사님의 ‘내려놓음'은 우리의 마음의 눈을 두드리고 계시며, 우리와 ‘더불어 먹는’ 친밀한 교제를 소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어떻게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맞이할 수 있는지, 그러한 신앙의 기본에 관하여 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책입니다.


 

고맙습니다, 성령님 (손기철 장로)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하나님의 영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 후에 승천하실 때에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우리에게 부어주신 보혜사(Counselor) 입니다. 성령의 역할에 관한 예를 들면, 성령은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 문자로서의 말씀의 내용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의 분별과 깨달음, 인도하심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일상의 삶 가운데, 가장 가깝게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성령에 대하여 성경의 말씀에 기초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돕는 책으로, 손기철 장로님의 ‘고맙습니다, 성령님'을 들 수 있습니다.


손기철 장로님은 현재 건국대학교 생명공학부 부총장이시며 온누리 교회의 장로님이십니다. 저는 손기철 장로님의 저서를 5권 정도를 읽었고, 말씀집회에도 후배와 여동생과 함께 참석했던 적이 있는데요, 말씀의 이해에 관한 통찰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특히 말씀 집회에서는 ‘말씀의 어루만지심’을 신앙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손기철 장로님의 설교말씀은 갓피플 (http://tv.godpeople.com/)에서 그 동영상을 접할 수 있고, 갓피플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동영상을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김우현 감독)



김우현 감독은 어느 날 우연히 지하철에서 만나게 된, ‘맨발의 천사’, 최춘선 할아버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됩니다. 이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입니다. (예전에는 ‘버드나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 그 다큐멘터리의 동영상을 접할 수 있었는데요, 지금은 더 이상 운영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최춘선 할아버지는 ‘남북통일’이 오는 그 날까지 신발을 신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시고, 맨발로 전도를 하시는 분인데요, 원래 목사님으로서 김포지역에서 고아와 노숙사를 섬기시던 분이었습니다.


김우현 감독은 어느 날,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나게 최춘선 할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그 전도사역을 관찰하기도 하고, 대화를 통해 그 분의 신앙과 인생에 대해서 알아가게 됩니다. 짧은 대화들을 통해서, 그 분의 신앙의 깊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검색해보니, 유투브에 최춘선 할아버지 다큐멘터리 동영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래에 게시합니다.

팔복, 최춘선 할아버지

 


아직도 가야할 길 (M. 스캇 Peck)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의 키워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고통’과 ‘사랑’. 이 책은 인생 가운데 경험하게 되는 고통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여, 그 고통을 직시하여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인생의 끊임없는 성장과 사랑의 성숙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의 북리뷰는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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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7 20:11

신앙적 타성에 대한 출구전략

'신앙적 타성'에 빠지는 시기는 항상 꾸준히 찾아오는 편이다. 나의 경우, 신앙적 타성의 증상은 주로 QT에 대한 집중력 약화 및 게으름과 나태함에서 관찰된다. 그리고 이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집중력 약화 및 영성의 탄력적 균형의 약화로 이어진다.


'신앙적 타성'에 붙들릴 때에, 기존의 대응책에는 몇 가지가 있었다. 

(1) 자기 책망을 통해서 마음을 다잡고자 노력하거나;

(2) QT의 방식을 변경시킨다. 혼자만의 말씀 묵상에서 '새벽설교'의 말씀을 듣는 방법으로 혹은 그 역으로 방법을 취함으로써 주의력을 환기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책은 효과적이지 못하였고, 사실, 그러한 대응책은 급조된 방안으로서 '하나님-나'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이 될 수는 없었다. 다만, '속수무책'에 대한 임시방편적 대안이었을 뿐이었다.


신앙적 타성의 문제에 대한 원인 진단은 조금 더 추론과 분석의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다만,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잠정적으로 한 가지 원인을 진단하자면, 현재의 상황에 대한 안정감으로 인한 현실안주 의식 또는 만족감으로 인해 심신이 지나치게 이완되거나, 영적인 긴장감과 영민함이 이완되어서 지속적인 신앙적 순종을 이어가는 믿음 또는 겸손이 무뎌진 결과로 신앙적 타성이 발생하게 된다고 본다. 


이러한 진단에 기초할 때, 한 가지 대응방안을 그 원인의 출발점으로부터 추출해낼 수 있다. 그것은 현재의 상황에 대한 막연한 안정감, 현실안주 의식 또는 만족감이 심리적으로 잦아든다는 판단이 성립될 때, 현재의 상황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사항을 정리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안정적인 또는 만족할 수 있는 현재의 조건과 상태와 관련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안정감 또는 만족감은 나름 긍정적인 생활 요소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이완된 마음 상태 가운데, 그 현실적인 상황과 조건을 허락하신 주체가 되시며, 평강을 은혜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망각된다면, 이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 형해화된 신앙만이 남게 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영광의 기도'는 그와 같은 신앙적 타성의 위기 상황 가운데에서 겸손의 태도를 견고하게 지켜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출구로 나아가는 방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안은 '하나님-나'의 관계를 깊이있게 진단함으로써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는 대책이 된다. 또한 현재의 상태에 대한 안정감 또는 만족감은 실제로는 자기착각에서 비롯된 것이고, 한편으로는 위기의 순간이 접근하고 있는 것이 예상치 못한 현실의 실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것은 그러한 가능한 위기의 순간에 대해서도 방어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지혜로운 대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 당면한 나의 신앙적 타성의 문제에 대응하여 몇 가지 감사의 기도제목을 나누며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여러가지 삶의 기회들을 열어주신 것을 감사드린다.

진로, 배우자, 나의 인격적인 연약함, 지성과 영성의 연단과 같은 이러한 고민과 문제점들을 차근차근 현실의 삶 속에서 여러 도전에 대응하면서 해결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연단의 과정을 밟아가면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진로와 배우자에 관한 기회를 열어주셨다. 내 마음의 어느 한 구석에서도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 허락하신 이 귀한 기회와 선물을 겸손히 받지 못하거나 진실된 감사가 빈약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겸손과 감사의 마음이 항상 진실되게 충만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의 중심을 붙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 나의 아버지의 건강과 평안을 지켜주셔서 감사드린다. 

나의 육신의 아버지께 나는 여러가지로 많이 부족한 아들이다. 군인이셨던 아버지의 직업 특성상 아버지-아들의 관계가 오랜 기간동안 가족 공동체 울타리 안에서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관계였고, 학자의 길을 걷는 인생의 선택으로 인해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기회를 넉넉하게 누리지 못하는 가족의 삶이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자율과 책임 정신을 강조해주셨던 가르침을 항상 기억하며 현실의 문제에 침착하고 지혜롭게 대응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에게 중대한 귀감이 되었다. 아버지의 정신과 태도를 마음 속 깊이 존경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나의 육신의 아비의 마음과 육신을 보호해주시고, 은혜로 감싸안아주시기를 기도한다.


(3) 내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 민족,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알게된 여러 지체들을 향하여 열린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나눔과 교제의 소망을 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한 나눔과 교제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항상 꾸준한 마음으로 중보하며 소망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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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5 06:53

사랑의교회의 회복, 변화와 갱신을 위한 운동

오정현 담임목사의 사랑의교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대표적인 운동은 '서초동 예배당 건축'에 의해 촉발된 "하우사랑(How Sarang)"이었다. 2009년 12월 18일 다음(daum)에 커뮤니티가 개설된 이후로 사랑의교회의 서초동 예배당 건축과 관련하여 교회의 건축 결정상의 하자와 건축허가의 불법성에 대하여 사회적 논의를 활성화 하는데에 기여하였다. 


<하우사랑, How Sarang 커뮤니티>



"시대와 상황 속에서 사랑의교회 새 예배당 건축예배 이후의 행동을 고민한다"



2013년도 초에는 오정현 목사의 박사논문 표절이 의혹으로 제기되어 3월에 이르러 논문표절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사랑의교회 진상조사위원회) 사실상 논문 표절의 문제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던 사건은 오정현 목사가 이러한 의혹에 대응하여 은폐를 위한 적극적인 압력을 행사하였고, 교회의 예배시간에 '담임목사직 사임'을 걸고, 논문표절 의혹을 부인하였던 것이었다. 


고직한 선교사를 통해 오정현목사 박사논문 표절문제 조사 보고서에 관한 배경과 관련 사태가 구체적으로 SNS를 통해 파급되었다. "오정현목사 박사논문 조사보고서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사랑의교회 당회는 3월 17일 최종적으로 199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포체스트룸 대학에서 오정현 목사가 취득한 박사학위논문이 여러 종의 저서 일부를 표절하였음을 결론짓고, 오정현 목사는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6개월간 자숙의 기간을 갖기로 했음을 밝혔다. 차후에 바이올라 대학의 박사학위논문도 그 표절이 문제가 되어 학위가 포기되었다. 


최근에는 사랑의교회의 현재 및 과거의 평신도, 장로 및 안수집사들이 '사랑의교회의 회복을 위한 기도와 소통네트워크'(사랑넷) 커뮤니티를 다음에 개설하였고(2013년 2월 15일, 5월 4일 현재 회원은 1,846명), 사랑의교회를 위한 정기적인 기도와 대화의 장을 운영해오고 있다. 이 커뮤니티는 오정현 목사의 진정한 회개, 사랑의교회의 회복과 변화, 갱신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랑넷, Sarangnet 커뮤니티>



이 커뮤니티의 "현 사랑의교회 사태의 배경과 진상"이라는 글을 통해, 사태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을 접할 수 있다. 


또한 오정현 목사의 목회활동과 관련하여 남가주 사랑의교회 담임목사 시기 때부터, 서울의 사랑의교회에서의 설교, 교회 운영 및 사역 등 전반적인 활동과 관련하여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바, 아래의 95조 공개질의서를 통해 11항목에 걸쳐 그러한 문제점들이 정리되고 있다.  

 


사랑의교회 회복과 갱신을 위한 정통 보수신앙 그룹이 오정현목사에게 공개질의 (95조항의 질의)


95개 조항의 큰 맥락은 다음과 같다. 
●설교 대필‧표절 및 친동생 오정일 집사(6개항) ●논문 표절 및 대필 의혹, 그리고, 거짓말 등 도덕성에 대한 질문(17개항) ●책, 교재 그리고 투고 원고 등의 집필(2개항) ●남가주 사랑의교회 시절(6개항) ●교회 운영(11개항) ●옥한흠 목사님의 사역계승(7개항) ●해외 사역(7개항) ●예배(4개항) ●개인 생활(4개항) ●재정 지출 및 권력 유착(3개항) ●서초동 SGMC건물 신축 관련(28개항)



<사랑의교회 안수집사회>




[옥한흠 목사님 - 사랑의교회를 위한 쓴소리 I]




[옥한흠 목사님 - 사랑의교회를 위한 쓴소리 II]



[옥한흠 목사님 - 사랑의교회를 위한 쓴소리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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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7 08:30

생각하는, 변혁하는, 그리고 참여하는 그리스도인

생각하는, 변혁하는, 그리고 참여하는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힘겨운 도전들과 겨루다 보면 어느 새 그 상황 속에 침몰되어 버리고 정작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할 '나의 좌표'를 잃어버릴 때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힘겨운 것은 아닌지', '내가 과연 이 시대와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한국 교회의 연합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이 이제는 마음의 중심에서 어느 덧 멀어져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신앙의 원래 바른 자리를 되찾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의 나의 상태를 진단하고 '나의 경계'를 넘어선 공동체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어떠한 기준과 방법론을  찾을 수 있을까? 이에 관하여 세 가지 잣대 (또는 기초적 방법론)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 세 가지 잣대는 또한 그리스도인이 정체된 신앙 생활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순종을 이루어 가기 위한 목표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생각하는 그리스도인 (Thinking Christian)

 

(1)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생각한다. 마음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셔서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이 내 마음에 부어지고 그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기 위한 무릎 꿇은 자의 자리로 나아간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분별하며 배우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뜻한다.

 

(2)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의 내면과 언행을 성찰한다. (자기 성찰의 그리스도인)


자기 자신의 생각과 사고의 불완전함, 죄성, 연약함을 우선 주 앞에 고백하고 성령의 은혜와 감동을 통해 자기 내면과 언행을 살펴 회개하고 바르게 고쳐간다. 또한 자신의 생각과 사고의 발전을 위해 지적인 훈련을 통한 연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나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주님의 뜻에 엎드린 자이다.

 

(3)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이웃과 세상을 관찰하며 문제의식을 품고 고민한다. (세상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이웃과 다른 사람의 필요를 고민하고, 세상에 관하여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둘째변혁(성장)하는 그리스도인 (Transformed Christian)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적인 변화와 성장의 여정에는 끝이 없다. 이러한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밟아가야 하는 기본적인 단계가 있다.

 

(1) '나'를 대면하기 (내면 질서의 확립)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성장과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사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바로 내면 깊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내면 깊은 곳에 숨겨져있는 묶여있고 상한 마음과 왜곡된 자아 정체감이 하나님과의 진솔되고 샘솟는 교제를 막는다. 그와 같은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마음을 열 수도, 하나님을 깊이 신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내적으로 침전될 뿐이다.


나의 연약함과 문제점에 대한 인식은 '지식'으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족과 불쾌함의 '감정'으로도 존재한다. (상황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 쉽게 인내심을 상실하고 흥분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은 그 순간의 불만족과 분노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한 것인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마음을 문을 닫고 회피하게 된다. 또한 자존감에 상처를 받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연약함을 대면하는 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연유는 바로 이것에서 기인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나를 '붙들고 있는 나'를 포기하고 나를 신실하게 사랑하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그 때에 비로서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내려놓음의 길로 향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유일한 '생명'이시요 '길'되심을 믿음으로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질서를 바르게 세우는 첩경인 것이다.

 

(2) 새 사람의 정체성 확립 (하나님의 자녀됨의 정체성)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의 '하나님의 자녀'됨 그리고 하늘의 권세가 나의 소유임을 믿음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깨달음으로써 나의 내면의 문제를 직시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치유와 회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의 질서 확립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역할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명감과 용기, 그리고 믿음과 도전 의식에 기초한 노력을 진실되게 시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응할 수 있는 나의 가능성.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잠재성을 이미 믿음으로 실제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셋째참여하는 그리스도인 (Participating Christian)


생각하고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나'의 경계를 넘어서서 넓은 세계에 참여함으로써 내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사랑을 나누고, 구체적으로 역사와 실제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운영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나'를 넘어선 세계로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기

앞에서 언급했듯이, 세상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상황과 시대를 관찰하고 연구한다.

나의 이웃과 나라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시대와 상황에 대한 인식과 문제의식을 갖출 뿐만 아니라 시대와 상황의 변혁에 대한 사명감을 정립해야 한다.

 

(3) 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


민주주의 제도는 사회라는 공동체를 운영하는 제도로써 국민의 합의와 공감대에 기초하여 성립되어 있다. 가장 최상위의 법인 헌법에서 이를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 제도는 삼권분립과 인간의 존엄성의 원칙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러한 원칙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중앙집권적 왕권제도 또는 독재를 극복한 정치제도이다. 권력의 집중을 견제함으로써 권력의 남용과 부패를 회피하고자 하는 목표를 내재하고 있는 제도인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 제도의 선한 도구로서의 가능성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제도의 이상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 하는 데에는 협력적 지혜, 소통과 타협이 필요하다. 사실, 인간의 존엄성의 궁극적 실현에 대하여 복음 속에 담지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만이 가장 최고의 해답이 될 것이다.


정치 및 사회개혁을 통한 민주주의의 발전이 하나님나라의 완성과 동일시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능력 (그리스도인 개인의 차원과 교회 공동체 차원)은 민주주의의 이상을 달성할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민주주의 제도에 각자의 은사, 능력, 사명을 따라 참여해서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이웃과 세상에 영향을 주는 국가가 선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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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9 14:25

고통, 배움, 그리고 성장


고통, 배움, 그리고 성장


시대와 상황 속에서 뜨거운 열정을 품고, 현실의 변화를 꾀하는 것...쉽지 않다. 마음은 저 곳에 있으나, 행동은 미치지 못하며, 현실은 이 곳에 있다.


개인적인 차원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국가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


그러나, 실패 또는 좌절로 인하여 고통의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그 자리를 피하지 않는 것, 맞서고 직면하는 것...그러한 최소한의 용기를 가지는 것. 너무나도 중요하다. 고통이 없는 곳으로 나 있는 인생의 길을 따라가고 싶겠지만, 정작 가야 할 바른 길은 그 고통을 품고 가는, 그 길로 행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인생에서 찾아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


인생에는 Irony가 있다.

- 사랑과 용서는 인간에 대한 깊은 회의의 고통과 상함을 지나쳐서 이겨낸 후에야 더욱 생명력 있는 사랑과 용서의 능력을 열매 맺는다.

- 희망은 절망의 구렁텅이를 거쳐서 연단된 후에서야 깨어지지 않는 신념과 소망으로 거듭난다.

- 지혜와 지식은 스스로에 대한 깊은 성찰과 비판을 통해서 자기 깨어짐을 맛본 후에야 깊은 샘에서 새로운 지혜와 생각을 길어 올릴 수 있다.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죽음을 잠시 맛본다. 그러나 그 고통을 통해서 생명이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은 거듭나야 한다. 끊임없이.


그러므로, 새로운 배움과 거듭나는 생명을 위한 귀한 성장의 기회를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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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1 10:44

통진당 사태에 대한 단상: 중간지대 없는 대결 | 김형석

통진당 사태에 대한 단상: 중간지대 없는 대결 (김형석)


1. 조준호 보고서에 관한 논점과 이정희의 대중기만 논리


이정희가 조준호 조사 보고서를 읽고서 기자들 앞에서 강경하고 단호한 어조로 내뱉은 첫마디는 암만 생각해도 매우 골때리는 것이며 이 웃지못할 현재 진행형의 희소극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에 한 번 더 반추해 볼 가치가 있다. 나는 티브이를 보지 않았으므로 언론에서 보고 들은 바를 토대로 대략적인 워딩을 옮겨 오기로 한다. "조준호 조사위는 해당 당사자에게 어떤 소명과 해명의 기회를 제공해 주지 않았으므로 무고한 사람들을 유죄로 만든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없이 유죄를 단정할 수는 없는데 소명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니 이 보고서는 무고한 사람을 유죄로 모는, 한 마디로 그 자체로 모종의 악의에 의해 작성된 부실한 보고서이다. 조준호 리포트의 신빙성 자체가 의심스러우며 그런 고로 리포트 자체를 다시 검증해야 한다"



나는 조준호가 어떤 내부 협의 과정을 거쳐서 경선 부정과 부실 여부를 판독하는 검사관에 임명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먼저 짚고 넘어가할 것은 이정희는 여기서 리포트의 신빙성을 문제 삼았지 적어도 조준호의 검사관 자격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말에서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조준호에게는 검사 시작 단계에서는 선거부정 여부를 검사할 권위가 당권/비당권파의 갈등 구조 하에서도 큰 문제 없이 정상적으로 부여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른 각도에서 봐도 조준호가 통진당 최대 주주인 민주 노총의 전 위원장 출신이라는 점, 유심노 와는 달리 출신 당색 자체가 옅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편은 아니지만 상대편도 아니'라는 점에서, 처음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 당권파 측에서도 조준호를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인사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준호는 당권파의 기대를 무참히 뒤집는다. 사실 생판 그 쪽 바닥을 모르는 백면 서생인 나 역시도 조금 놀랐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아무리 객관적인 조사 임무를 맡은 검사관 자격이라고 해도 제 집 사정의 치부를 공중 앞에 무자비하게 까발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 집 허물은 조금이라도 덮어줄 여지가 있다 싶으면 덮어주고 가려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조준호는 그러지 않았다. 조준호 발표가 '총체적 부실 선거'라는 화끈한 레토릭으로 단호하게 정리되어 나올 줄 누가 예상이나 했으랴. 물론 조준호가 원래 포청천 같은 사람이라서 추호의 타협의 여지 없이 그랬을 것 같지는 않고 선거 부실의 규모 자체가 원채 스스로도 상상하지 못했던 규모라서 인지상정을 발휘해 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겠지만.


선서 부실조사 v. 선거 부정조사, 그리고 위험책임론


처음 제기되는 문제는 조준호가 원래 맡은 조사의 성격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이다. 뭉뚱 그려 거칠게 말하자면 '비례 대표 선거의 부정과 부실 여부를 일체의 숨김 없이 조사하라.' 아마도 이런 종류의 것이었으리라. 그렇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여도, 선거의 부실 여부를 조사하는 것과 선거의 부정을 조사하는 것은 매우 다른 성격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초등학교 반장 선거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선거의 부실 여부를 조사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무효표를 유효표로 잘못 계산했거나, 역으로 유효표를 무효표로 잘못 처리했는지가 가장 큰 목표가 된다. 이것은 투표함을 다시 열고 시간을 가지고 차분히 조사해 보면 되는 것이며, 그 결과도 쉽게 판독이 된다. 따라서 선거 부실 조사는 상당히 테크니컬한 성격을 띄게 된다. 반면 선거 부정의 조사는 그렇지 않다. 유효처리된 무효표가 무더기로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집계원의 단순 실수인지 아니면 어떤 정치 세력의 사주를 받은 고의적인 조작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집계원이나 검표원에 관한 어느 정도의 강제 조사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선거 부정의 조사는 그러므로 테크니컬한 조사가 아니라 인적 조사의 성격을 강하게 띄며, 이런 조사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부실 조사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권한이 필요하게 됨은 당연 지사라고 볼 수 있다.



조준호가 조사를 며칠간 수행 했나?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건, 이정희가 기자회견에서 요구하는 정도의 부정에 관한 조사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얼핏 생각해 봐도 조준호에게 그가 실제로 수행한 조사 기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과 강도 높은 조사권이 부여 되었어야만 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조준호의 조사는 개연적인 추측이지만, 애초부터 부정보다는 선거의 부실 관리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판독하는 것에 집중되었을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조준호의 발표 어디를 봐도, 그 동안의 유/심의 레토릭 어디를 봐도 당권파 누구를 구체적으로 지칭해서 부정 선거의 당사자는 당권파다는 식의 주장을 한 적이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부정 선거의 주범이 당권파라는 주장은 언론이 만들어 낸 프레임이지, 유/심/조준호 세 사람의 레토릭 속에 들어 있지는 않았다. 그들이 일관적으로 주장했던 것은 "부정 선거의 책임이 당권파 니네들 한테 있으니까 당권파 니네들 비례 대표 후보들이 책임을 지고 사퇴해"가 아니라, 비례 대표 당선인들의 부실 연루 여부와는 상관 없이, 이미 선거 결과가 신뢰성을 상실했으므로 그에 따라 그 선거의 영향을 받은 모든 경쟁적 비례대표 명부자들이 정치적 연대 책임을 지고 동반 사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 책임, 즉 부정 선거에 대한 정치적 책임과 부실 선거에 대한 정치적 책임의 성격이 원래부터 다르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사태의 본질로 다가가는 출발점이 된다. 잠시 화제를 돌려 94년 성수 대교 붕괴 사고로 시선을 돌려보자. 성수 대교가 갑자기 두 동강이 나면서 한 부분이 완전히꺼져 버렸다: 통학 시간 여고생들을 가득 채운 버스가 추락했고 채 인생을 펴보지도 못한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이 사망했다: 이 사태의 최종적인 책임소재는 누구에게 있는가? 이 사태의 책임은 또 어떤 식으로 물어져야 하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발생한 행위가 '누구'의 '탓' 인지를 가리는 것이다. 그리고 '탓'을 가린다는 것은 사건이 단순히 자연의 불가항력으로 발생한 것이아니라는 것, 즉 인재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끔 보면 그 '탓'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누구'를 선뜻 지정하기가 까다로운 경우가 발생한다. 성수 대교 사건이 그렇다. 성수대교 붕괴 사건은 누구의 탓으로 돌려야 하나? 성수 대교 붕괴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많은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다: 설계 자체에서 구조적인 결함이 있었을 수도 있고, 시공 과정에서 시공사가 설계도 대로 건설하지 않거나, 혹은 원래 예정된 건축재 대신 단가가 낮은 싸구려 부실 건축재를 썼거나, 혹은 완공 이후 시설 유지 보수를 소홀히 했다거나 혹은 감독 관청이 감독 책임을 소홀히 했을 수도 있다. 시공사와 감독 관청간의 이권적 유착 관계가 또 다른 원인을 제공했을 수도 있고, 이런 유착 관계를 잡아 내는 못한 검찰에도 책임을 물을 여지는 분명히 있다. 요컨대 성수 대교의 계획 단계에서부터 설계 시공 유지 보수 감독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들에 이르기 까지 사고에 관여한 무수히 많은 에이젼트들이 있고,이 에이젼트들간에 존재하는 모럴 해저드, 유착 관계 기술적 무지, 탐욕 등등이 성수 대교 붕괴의 커다란 인과 관계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성수 대교 붕괴 사건의 경우에 이 모든 에이전트들의 귀책- 즉 과실과 직무 태만 고의성 여부 등등 -을 구체적으로 따져서 각각의 에이젠트에 따라 그에맞는 '탓의 양'을 책정하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과실과 실수, 고의의 태만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잠시 주의를환기해 보자. 보통 근대법 체계의 책임 원칙은 귀책 개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귀책 개념은 어떤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를 통해 타인에게 해악을 가하였다는 사실+그 행위가 행위자의 과실 혹은 고의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문제는 성수대교 사건의 경우처럼 한 사건에 무수히 많은 에이젼트가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을 통해 조금씩 행위에 관한 책임을 분유해 왔다면 전통적 책임 개념 원칙에 따라서는 적절한 책임 분배를 할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위험 책임 개념이 바로 이 자리에 대안으로 등장한다. 위험 책임이란 행위의 결과로부터 그 원인을 제공한 주체로 그 소급해 들어가는 전통적인 책임구조가 이런 사건의 경우에 치명적인 한계점에 봉착한다고 보고, 발상을 전환하여 발생 가능한 위험에 대한 책임의 주체를 미리 규정해 두고, 그 위험이 현실화 되었을 경우에 그 주체의 과실 유무와는 상관 없이 연대하여 각 주체들이 일정한 연대 책임을 지게 한다는 원칙이다. 위험 책임의 원칙을 성수 대교 사건에 빗대어 적용해 보자면,  건설 단계에서부터 이미 각 행위자들에게 귀책 여부에 상관 없이 일정 정도의 책임을 연대해서 지게 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사태의 소재를 정확히 구분해서 가릴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으로 앞으로 비슷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수 대교의 붕괴 사고와 이번 통진당 선거 부정/부실 사건은 바로 이런 면에서 많이 닮아 있다. 한 사태에 수많은 에이젠트들의 행위가 인과적으로 개입되어 있고, 그 책임 소재를 가리는 점이 매우 어렵다. 만약 이번 사태의 관건이 부정 선거 연루자를 색출하는데 있다면, 엄격하고 철저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고, 이정희의 말마따나 해당 혐의자에게 부정 선거를 한 해당 행위자로서 정당의 내부 심판대에 세우기 위해선 구체적인 입증 증거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사태의 본질이 여기에 있나? 본질은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절차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대형 사고가 났다는 것이고, 그 피해가 막대한 이상 그에 적절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고 원인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은 이상 그에 연관된 모든 행위 주체가 연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가 이번 사건의 포인트이다.



이 두 레토릭의 차이, 즉 '부정 선거의 책임에 의거한 개별적인 징벌적 사퇴'인가 아니면 '부실 선거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이해 관계인의 연대적인 사퇴'인가를 구분하지 않고서는 이 사태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 레토릭의 차이가 이해될 때만이, 이정희의 저 첫마디가 얼마나 대중 기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명확히 드러날 수 있다. 이정희가 형사법의 책임 원칙을 끌어 들어와서 자신이 속한 계파를 옹호하는 방어 논리는 부정 선거의 책임에 의거한 개별적인 사퇴의 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비당권파가 부정 선거의 책임을 당권파, 특히 이석기를 주축으로 한 당권파 비례 대표 당선자들에게 억지로 돌리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어떠한 소명 기회도 주어 지지 않았고 그들이 부정 행위에 연루되었다는 어떤 증거도 검사측 입장에 있는 조준호가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죄 추정 원칙에 의거하여 이석기 김재연은 무죄이고, 따라서 이들에게 비례 대표에서 물러나라고 하는 것은 억지라는 것이다.

이정희의 이런 논리는 전형적인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에 해당한다. 즉 상대방이 하지도 않았던 주장을 했다고 가정하고, 그 허구의 주장을 반박하는 전형적인 기만의 논리이다. 동시에 이정희의 이 주장은 이번 사태의 본질이 부정이 아닌 총체적 부실에 있다는 점 - 즉 설사 그 부실의 원인이 특정 정치 세력의 사주와 결합된 것이 아니라, 집계원이나 검표원들이 동시 다발적이고 중대한 대규모의 실수, 혹은 선거를 제대로 관리 감독할 시스템 조차 갖추지 못한 초보적인 관리 실수에 있다고 할지라도, 일단 대규모의 부실 선거 정황이 포착된 이상, 경쟁적 비례 대표 명부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연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점 - 을 고묘히 호도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다.

 

2. 중간 지대 부재의 통진당의 종착역

 

이정희의 이 논변은 동시에 자신이 계파가 애초에 묵시적으로 인정했던 조준호의 조사권의 권위을 간접적으로 스스로 부정함으로서, 한 정당의 내부 정치 구도 안에서 갈등 조절 메카니즘이 제대로 유지 되기 위해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기본적인 권위의 기반을 스스로 붕괴 시켜 버리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이정희의 첫 기자 회견부터 시작되어 이정희의 사퇴와 사무총장 장원창의 쿠데타, 그리고 오늘의 두 비상 대책위 체제에서 흐르는 일련의 흐름이 보여주는 통진당 내부의 극미한 무정부성, 정당 내부 권위의 철저한 붕괴 상태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여기 어떤 분은 통진당 내부에 갈등 조절 기능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메커니즘 - 즉 중간 지대의 조정 권위-에 관한 일정한 통찰력을 보여주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메터니즘의 실패의 원인을 유시민에게 돌림으로써 반쪽짜리 통찰에 머물고 있다.



사태를 이렇게 의도적으로 세팅한 쪽은 유/심/조가 아니라 이정희이다. 이정희가 기만적인 논리를 써서 '보고서 자체가 부실한 것'라는 말로 간단하게 조준호 보고서의 신뢰성을 비토했을 때, 통진당 내부의 통합을 유지할 수 있는 정당 내부의 제도적 권위의 메커니즘은 이미 무너진 것이다. 사태를 이렇게 전개시킴으로서 추후에 어떤 주체에 의해, 어떤 내용의 보고서가 작성되더라도, 정치적 입장과 이해 관계를 달리하는 상대 세력들 역시도 딱 그 한마디의 동일한 논리에 의해 조사자의 권위 자체를 간단히 무너뜨릴 수 있게 되는 명분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간 지대 없는 대결 사태의 종착역은 사실상의 정당 내부의 내전 상태 밖에 없다는 것은 애석하게도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정당의 패권적 지배를 고착시킬 수 있는 도구: 비례대표 제도



한 정당의 내부 정파가 이정희를 비롯한 당권파가 보는 식으로 비례 대표 제도를 자신의 정파적인 이익을 관철시키는 도구로만 바라보게 되면, 민주주의 자체가 결국은 치명적인 위험에 처할 수 밖에 없다. 비례 대표 제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존의 거대 정당이나 새로 영향력을 획득한 신생 정당에게 부여된, 국회 의원을 정당 마음대로 뽑게 해주는 정당에게 부여된 우선 특권인가? 비례 대표 제도는 정당 내부의 각각의 분파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재생산 시키는 도구인가? 이런 거지같은 생각이 횡횡하는 한, 그런 거지같은 민주주의 관념이 판을 치고 있는 나라의 유권자들은 정당의 패권적 지배 행태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국민이 아닌 정당에게 국회 의원 선출권을 위임한다는 의미에서, 비례 대표제도는 흔히 말하는 대의제 민주주의 (representative democracy) 의'대의성', - 즉, 개별적으로 사고하는 개인들의 무수히 많은 집단적 의견을 소수의 사람들에게로 모아주고 단순화 시켜준다는 의미의 대의성 -에 또 다른 의미의 대의성, 즉 '정당을 국회 의원의 직접적인 선출 기관 자체로 만들어 준다'는 보다 추상적 의미의 대의성을 첨가시킨 것이다. 쉽게 말해,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해 줄 만할 인물을 유권자가 직접 뽑는게 전통적 의미의 대의제 민주주의라면, 인물이 아니라 유권자가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해 줄 만할 정치 세력에게 대표를 뽑을 수 있는 권리를 '이양'해 주는 것이 비례 대표제도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서 자신이 속한 지역구에서 단 한 사람의 대표만을 뽑을 수 있었던 일반 유권자는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통해 수십 명의국회 의원을 선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일반 유권자 입장에서도 정당 입장에서도 비례 대표제는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제도인 것이다.



이렇게 비례 대표제도 안에는 기본적으로 유권자- 정당 간, 정당 - 비례 대표 국회 의원 간의 2중적인 대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비례 대표제에는 장점만이 있을까?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런 이중 대의성으로 특징되는 비례 대표제에는 간과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알 수 있다. 이렇게 물어보자: 우리는 우리가 지지하는 정당이, 일반 유권자들에게 위임받은 그 선출권을 제대로 행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어떻게 아는가? 



지역구 투표로 선출되는 국회 의원의 경우,  기본적으로 타당 후보와의 경쟁 구도를 통해 그의 정치적 판단력과 신념, 정치적 지향성, 삶의 내력 등 필요한 정보들이 언론에 노출되고 검증될 수 있는 반면, 비례 대표 국회의원들의 경우에는 그 후보들이 정당 내부에서 어떻게 추려지고 어떤 원칙에 따라선정되는지, 일반적인 유권자들은 알 길이 없다. 사실 유권자들에게 정당의 비례 대표가 선정되는 방식은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아니다. 그리고 이는 비례 대표의 순위를 정하는 것은 정당 내부의 역량과 지도부의 정치적인 결정에 맡겨도 된다는 그동안의 대중의 암묵적인 동의를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었다.



비례 대표 제도의 원래의 도입 취지에 충실하여 지역구 대표제를 통해서는 충족되기 어려웠던, 다양한 직능 대표성을 가진 참신한 정치 신인들이 정치무대에 올라오면 좋겠지만, 현실은 이념에서 그리 가까운 것 같지 않다. 정치력이나 정치적 덕성이 매우 부족한 사람이더라도 단지 정치 자금을 낼 수있는 여력이 있다는 이유 만으로 비례 대표 우선 순위에 배정될 수도 있고, 단지 지배 정파의 우두머리와 가깝고 충성심이 강하거나 혹은 단지 언론에노출되어서 대중적 인지도가 단순히 높다는 이유만으로 높은 순위의 명부에 배정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사례가 매우 흔하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아니다. 그런데 휠씬 더 놀랍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과거 현재 불문하고 지배 정당 내부에서 비례 대표 선정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온 것은 민주적 의사 결정 방식이 아니라 그 정당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보스의 의중이었다는 우울한 사실이다. 새누리 민주 할 것 없이, 견고한 지지도를갖춘 강력한 대권 후보를 갖춘 지배적인 정당일 수록, 비례 대표는 물론, 지역구 후보의 공천 결정 과정에서도 민주적인 의사 결정 과정이 한켠으로 밀려 나고 그 자리를 보스의 의중이 차지해 왔다는 사실은 비례 대표의 운용방식이 얼마나 낡고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면, 통합 진보당이 도입한 비례 대표 명부제의 선출 시스템이, 그 자체로 놓고 봐서는 기존의 새누리- 민주 양당이 가지고 있었던 비례 대표 선출 시스템 보다 분명히 진일보하고 더 민주적인 면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이번 사태는 진보 정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해 왔던 소수의 지지자들 뿐만 아니라 개혁/진보/통일/정치적 자유/관용에 방점을 두고 진보당에 두번째 정당표를 던져 왔던, 포괄적인 진보의 가치를 취했던 거의 모든 지지자들을 하나 같이 깊은 회의의 나락으로 빠뜨리고 있다.

 

3. 진보정치 재구성의 출발점

 

이 회의감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무기력감의 원인이 대체 무엇인가? '당권파가 저지른 선거 부정과 부실 때문' 이라는 답변은 현 상황을 휘어 잡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무기력감과 분노의 반의 반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현 상황이 진보/개혁 진영에 주는 무기력감과 분노의 원인은 부실/부정 선거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이후 일군의 정치 집단이 보여준 정치적 행태와 사고 방식 자체에 존재한다.



즉 한편으로는 제도 자체를 자신의 패권적인 정치와 계파 권력 확대의 수단으로만 사용하려는 부류가 진보 진영에 우리의 우군으로 존재해 왔다는 사실에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최소한의 상식에 근거한 제도에 호소하여 자신의 권력적인 기반을 넒혀 가려는 정치성이 아니라, 어떠한 제도와 상식, 그리고 어떠한 내부적 권위라도 - 비록 그것이 타자가 부여한 것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 참여하여 산출한 권위일지라도- 자신의 세력 유지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 폐기하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믿는 정치성이, 우리 안에 오랫동안 도사리고 있었다는 우울함, 그리고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다.



부실과 부정 선거의 틈바구니 안에서 스멀스멀 솟아오른 이 정치적 분노와 무기력함의 짙은 안개가 현 정치 상황을 둘러싸고 있다. 만약 이 안개가걷히지 않는다면 그 안개를 소구하는 병적 원인들은 앞으로 끈질기게 진보 정치를 짓누르는 족쇄가 될 것이 분명하다. 조금이라도 투명하게 그 안개를 규정하고 자각하고 기술하는 것, 진보 정치의 재구성의 첫 출발점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어야 한다.



Author: 김형석


한양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전공 분야는 법철학, 법이론, 기초법이며 세부관심 분야는 일반 규범 이론, 비교사법, 법원론 등이다. 현재 하노버 대학 법과대학에서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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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9 10:52

공직선거법 제148조 제1항 [부재자투표소 설치기간] 규정의 위헌성 (장영재)

공직선거법 제148조 제1항 [부재자투표소 설치기간] 규정의 위헌성 (장영재)



 서론

대한민국은 땅덩이가 크지 않고, 교통이 매우 발달해있어 일부 도서지역을 제외하면 어디에서 출발하든 전국 어디든 6시간이면 갈 수 있다. 심지어 인터넷 쇼핑몰에서 아침에 주문하면 오후에 상품이 배송되는 나라이다.

그런데 도장이 찍힌 투표용지 즉 기표용지의 경우에 이것이 주소지를 관할하는 선거관리위원회로 돌아가는 데에 더 시간이 소요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우리 공직선거법은 부재자투표소를 선거일보다 5~6일 일찍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선거일에 주소지에 없음에도 투표할 길을 열어주어 고맙긴 하지만 어째서 5~6일이나 일찍 투표해야만 하는가?



헌법상 평등선거의 의미와 선거의사 형성에 있어서의 평등의 문제

헌법 제41조는 평등선거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평등선거의 원칙은 나이, 성별, 재산 등을 따지지 않고 누구든 1표를 행사하고 그 1표의 가치가 같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평등선거의 원칙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투표가 행해지기까지의 과정도 동등해야 한다. 투표까지의 과정에서 차별이 발생한다면 결과적으로 동일한 한 표로 계산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동등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만 하는 것이다. 즉 모든 표가 동일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 전제조건으로서 모든 투표권자가 투표를 하기에 앞서 필요한 정보를 동등하게 얻을 기회를 제공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전제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선거도 평등선거의 원칙이 지켜진 것이라고 한다면, 예를 들어 A 지역 거주자는 대통령 후보 모두의 출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정보를 얻은 뒤 투표를 한 것에 반해 B 지역 거주자는 대통령 후보들의 이름 밖에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투표를 하게 된 경우, A 지역 거주자와 B 지역 거주자는 모두 동일하게 한 표를 행사하였고, 그 한 표는 동등한 가치로 선거에 기여하였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는 결과가 발생하게 되나. 과연 이런 형식 논리만으로 평등선거였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지 의문이다.



투표자가 후보자와 정당을 선택하여 투표용지에 표기를 하기 위하여는 정보가 필요하다. 대통령으로, 국회의원으로, 지방자치단체장으로 선출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각 정당이 선거운동을 통해 알리는 정보, 심지어 낙선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부적절한 후보자라고 알리는 정보 등을 모두 취합해 투표자는 투표용지에서 가장 적합하다라고 여겨지는 후보자와 정당을 찾아 도장을 찍는다. 그런데 일부 국민이 이런 정보를 접할 충분한 기회를 박탈당한 채 투표를 하게 된다면 그것이 과연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현재의 부재자투표제도를 살펴보면, 이러한 선거정보를 접하는 데 있어서 부재자투표자는 선거일에 투표하는 사람에 비해 차별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예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부재자는 공직선거법 제148조 제1항에 따라 5~6일 먼저 투표를 해야하기 때문에 남은 선거기간동안 여전히 후보자와 정당에 대한 정보가 발생되고 있음에도 선거일에 주소지에 가서 투표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부득불 부재자투표기간 이후에 생겨나는 정보들은 배제한 채 투표를 해야하는 것이다.



과거 선거에서 재밌는 사례가 있었다. 바로 2002년 대선이다. 당시 정몽준 現 한나라당 대표와 故 노무현대통령은 후보단일화에 합의하였는데 선거 하루 전인 12월 18일, 정몽준씨는 노무현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버렸다. 당시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은 부재자투표소 설치기간을 선거일전 5~7일로 규정하고 있었으므로 부재자투표를 한 사람들은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준 지지철회 사건을 접하고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처럼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투표를 해버렸기 때문에 지지철회로 인해 노무현 후보자에게 투표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었고, 반대로 노무현 후보자에게는 절대 투표하면 안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됐더라도 이미 투표를 했기에 그것을 취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선거일에 투표를 한 사람들은 하루 전에 발생한 정보까지도 그 투표에 반영을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부자재는 선거에 있어서 차별을 받았던 것이다.



요컨대 선거정보를 동등하게 접할 기회를 갖고 이것을 바탕으로 의사를 형성해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는 모든 투표권자에게 동등하게 주어져야할 권리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투표용지의 회송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고 더구나 우리 헌법 어디에도 선거일에 개표를 해야한다는 규정이 없어 선거일 이후 개표를 해도 됨에도 부재자투표를 선거일보다 일찍 함으로써 부재자투표자가 일반투표자와 비교해 제한된 선거정보만을 가지고 투표를 하게 하는 것은 평등선거의 원칙을 반하는 것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부재자투표소 설치기간에 관한 공직선거법 제 148조 제1항의 위헌성과 국가의 의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문제를 제기한다면, 선거에 있어 부재자라고 할 때 이 부재자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 선거일에 투표를 할 수 없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선거일에 투표를 할 수 없는 사람과 선거일에 투표는 할 수 있지만 주소지가 아닌 곳에 있어서 투표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 중 전자에게는 (지나치게 일찍 부재자투표를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선거일보다 앞서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의 선거권을 보장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그런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즉 후자는 선거일에 투표를 할 수 있지만 선거일에는 부재자투표소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5~6일이나 앞서 투표를 해야만 한다. 선거일에 부재자투표를 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면 선거일 하루 전에라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대통령 선거의 경우 그 개표장소가 반드시 주소지여야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요컨대, 대한민국은 부재자투표소를 하루 이틀이 아니라 사오일동안도 설치할 수 있는 충분히 부유한 국가이며, 기표용지를 6시간 이내에 관할 선거구로 충분히 회송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또 부재자투표와 일반투표가 같은 투표소에서 이뤄지더라도 두 기표용지를 구분해 각기 다른 투표함에 담을 수 있는 방법정도는 개발가능한 국가이며 나아가 정보통신기술을 응용한 새로운 방식의 투표방식도 충분히 개발가능한 국가이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능력과 민주주의에 있어서 선거제도가 갖는 중요성과 모든 국민이 동등한 조건에서 투표를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헌법이 추구하는 정신이라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부재자투표소 설치기간을 규정한 공직선거법 제148조 제1항은 단순히 선거의 편의성을 위해 부재자를 차별하는 위헌적인 규정이라 생각된다.



Author: 장영재

한양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현재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있다.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공법학회 제2대 학회장으로 활동하였고, ‘리걸클리닉’ 공익소송일반 팀 활동을 통해 공익소송에 참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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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6 17:10

크리스찬이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크리스찬이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근에 성경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고 있는 하나님은 ‘나의 음성에 항상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의 기도에 언제나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다.

시편 5:1~:3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이 말씀은 다윗의 고백과 기도이다. 하나님의 충성된 종, 다윗은 어린 나이에 골리앗을 단숨에 물리친 영웅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왕권을 넘보는 아들에게까지도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쫓겨다니는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한 고난 중에서도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를 주님께 다 맡기고 제사와 기도로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꿇고 나아가는 충성된 종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신 이유이다.

마가복음 5:25~29, 34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 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상당히 독특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와 구원의 선포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스스로의 행함을 통해 치유를 받았다. 이 여인의 믿음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마가복음 11:23~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을 통해 생각해볼 점은 다음과 같다. 기도하는 자의 믿음은 어떠해야 하는가? 헛된 기도가 아니라 응답받는 기도는 어떠한 차별된 기도인가?

 

리즈에서의 1년. 많은 고민들과 다양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겸손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었다. 나의 기도에 반응하시며 ‘새 일을 행하시는, 능치못할 일이 없으시며, 기적에 능하신 하나님’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기도할 때의 나의 생각과 기대보다 더 큰 일을 앞서서 성취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새롭게 되었다.


신년 예배 때에 받은 말씀이 다윗의 고백이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39:7)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겸손히 하나님만을 바라며 구하는 이 다윗의 기도, 그러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높고, 깊음, 그리고 그 부요함이 기도하는 자의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다시금 느낀다.

 

크리스찬이 기도하는 이유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인생에는 반드시 기도만을 붙들어야 하는 순간이 닥쳐온다

자신의 소유 (지식, 지혜, 경제적 부, 인맥 등), 가장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것, 그리고 평소에 습관적으로 또는 익숙하게 의지해왔던 것들. 인생에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문제 해결에 전혀 소용이 되지 못하는 고난의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그러한 고난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서 지식과 정보를 취할 능력이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준비되지도 않고, 예상치도 못한 상황'으로 찾아오게 마련인 것이다. (‘현재'라는 시간을 지배할 수는 있어도, 동시에 ‘미래'를 지배할 수는 없으며, ‘이 곳'이라는 공간적 제한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동시적으로 ‘저 곳'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취하는 데에는 반드시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한 고난의 순간에 취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지혜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심리적인 성급함으로 인해 자신이 가진 자원과 시간을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시간적인 여유는 별로 남아있지 않고, 선택의 여지도 좁아져 간다.


그런데, 그 순간 두 가지 질문만 한 번 스스로에게 던져보자. 나는 하나님을 왜 믿는가? 과연 이 순간 나의 인생의 참된 주권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인가? 그러한 고난의 때에 하나님이 나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답은 ‘아니오’가 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믿음이 재확인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도 못하고, 그 하나님이 ‘살아있는 하나님’으로서의 의미가 없다는 신앙의 현실이.


그 고난과 위기의 순간, “하나님은 나에게 어떠한 존재인가?”라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출애굽하여 홍해 앞에 이르게 된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고 있는데, 바로 앞은 홍해가 막고 있다. 피할 곳이 없는 위기의 순간,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어주셨다. 모세를 통해 홍해를 열어주신 것이다.


모든 수단의 유용성이 의심되는 위기의 때에, 신속하게 하나님께 무릎꿇지 않는 크리스찬은 궁극적으로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문제로부터, 그리고 조급함 또는 성급함에 붙들려 자포자기 하고, 위기 상황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맞서야 하는 문제로부터. 크리스찬 신앙인이기에 이미 자신의 구원자에 대한 개념적인 지식은 있지만, 위기의 상황 가운데 그 지식이 실제적인 차원에서 믿음과 신앙의 기초가 되지 못한 결과이다.

 

2. 크리스찬의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본적인 방법이다

“Sin”(죄)의 어원의 의미는 ‘과녁을 벗어남’이다. 다시 말해서, ‘죄’란 하나님이라는 중심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의미한다. “주변화된 내적인 상황과 외적인 현실”을 바로잡는 방법은 죄인이 스스로 구할 수 없다. 물에 빠져 허우적 대며 구원을 필요로 하는 자가 스스로의 머리채를 붙들어 구원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해답은 오직 중심의 회복에 있다.


보혜사 성령은 인간의 내면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으로 거하신다. 기도는 육신의 모든 시야를 닫고, 내면의 중심에 오직 하나님 만을 모심으로써 시작된다. 기도의 의지와 뜻, 정성을 비롯하여 ‘기도’ 는 죄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와 믿음을 담지하며, 하나님 중심의 회복을 통해 죄의 문제로부터의 해방을 성취하는 길이다. ("주변화된 외적인 현실"에 대해서는 아래 3.에서 구체적으로 다룬다.)


기도는 나아가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을 내면에 심는 방법이다. “자기 자신의 부인”, “옛 사람을 벗는 것”, “기름에 담겨진 심지가 되는 것”, 그리고 “날마다 죽는 것”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야 한다. 구원을 받은 피조물의 생명은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가지로서 누리는 생명으로 비유될 수 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에 뿌리박아 심겨진 나무로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

시편 1: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중심에 모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 바로 이것이 날마다의 삶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본적인 모습이다. 크리스찬으로서 누리는 생명력 넘치는 “생명의 삶”이다.


기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인간의 교제와 나눔은 하나님이 갈망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말씀의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내면에 임재하시는 것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 뜻, 그리고 사랑을 충만히 채우고 깊은 교제를 이루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그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다.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3. 언제나 미리 기도할 필요가 있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겠으나, 기도의 능력과 그 응답에 대한 신뢰와 의지가 일상의 삶 속에서 훈련과 습관으로 다져지지 않았다면, 위기의 순간 또는 고난의 상황에 직면하여 기도로 대응하는 태도를 쉽게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크리스찬은 위기와 고난의 때가 닥치기 전에 미리 훈련과 습관을 따라 기도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자원과 시간을 활용하되, 하나님의 뜻과 시기를 앞서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데, 문제해결을 위한 대응을 기도로 시작하는, 그러한 기도의 훈련과 습관을 위해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방법론적 우선순위).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중심의 회복을 외적인 현실속에서 실천하는 기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는 미래에 대한 염려에 붙들린 비관주의인가? 아니다. 겸손히 무릎꿇은 기도의 크리스찬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수용하며 그 생명의 능력을 갖춤으로써 닥쳐오는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도 이미 준비되고 더욱 담대해질 수 있다. 준비되지 않은 크리스찬에게는 인생을 뒤엎어 버릴 만한 폭풍우 같은 험한 위기와 고난으로 닥쳐오는 그러한 상황에 대해서, 기도로 준비된 크리스찬은 이를 감당해 낼 수 있는 영적인 역량을 갖춘 하나님의 사람으로 굳건히 설 수 있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7~10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4. 글을 마치며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진정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신가? 이 질문에 대한 ‘예’라는 대답은 자신의 책임에 달려있다. 항상 나의 소리를 듣고 계시며, 나의 기도에 쉬지 않고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기도로써 나아가는 삶을 선택하고 있는지, 그러한 선택과 결단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삶의 순간들과 고난과 위기의 상황은 기도의 계기가 된다. 깨어있지 않으면, 기도의 기회를 놓치며, 하나님의 뜻을 놓치고 만다. 깨어 기도하되, 습관과 훈련을 통해 미리 기도하라.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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