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03 00:58

소망교회 새벽기도회 2014. Sept. 5th Week (고린도전서 10:23 - 11:16)

29일 Mon. 고린도전서 강해(31)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사도 바울에게는 가장 기본적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자유의 원칙, 근본을붙잡는 원칙. 가장 중요한 원칙과 본질을 붙잡고 있어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측불가능한 자유, 방종이며 문란이며 목표의 상실이다. 복음을 통해서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했다. ‘본질’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원칙을 지켜야 하되, ‘비본질’에 대해서는, 그것은 없어도 된다. 자유가 있어도 유보해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비본질’을 놓고 다툼이 있는 경우가 많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가 본질을 향하여 나가느냐, 비본질적인 것에 묶여있는가? 


근본 원칙에 관한 관계성이 네 가지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원칙

i. 사물은 유동성과 변화가 수반된다.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문제가 생긴다. 나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도. 나 자신이 변하다. 이웃도 마찬가지이다. 배신도 당할 수 있는 것이 이웃. 원칙과 근본적인 본질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그것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바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ii. (31) 무엇을 하든지, 내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종교개혁자의 부르짖음 속에서는 ‘Soli (오직) Theo (하나님께만) Gloria (영광을)’, 사도 바울이 갖고 있던 이 원칙을 종교개혁자이 자신의 원칙으로 삼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의 성향과 인격도 변화시키고,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화시킨다. 홀로 있던지, 세상 속에 있던지, 먹던지 자던지, 무엇을 하던지. 

iii.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높아지는 것은 주기도문의 서두의 세가지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나를 통해서 이 땅에서 성취되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모든 분야와 자리에 확대될 수 있는 것.


이웃과의 관계

i. ‘내가 자유자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덕을 위해 절제하고 유보할 수 있다’. 

ii. 내 이웃을 잘되게 하라. ‘나는 잘되고, 너는 잘되지 않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공멸의 결과는 낳는다. 그러나 ‘당신이 잘되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상호 번영의 결과는 낳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이 교훈을 실험하라. 아내를 위해보라 남편이 위축되는가, 귀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남편을 귀하게 여기면 아내가 높임을 받는 것이다. 아내와 남편이 서로 인격을 존중하고 사랑하면 나도 살고 상대방도 산다. ‘내가 너보다 낫지’라고 하면서 내 유익만을 구하면 공멸하게 될 뿐이다. 가정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iii. 신앙의 공동체에서도 그러한 원칙에 따라야 한다.

iv. 세상에서는 너무나도 잘하는 사람, 그러나 가정에서는 남편이나 아내, 자녀에게 너무나도 못하는 사람. 목사도 마찬가지. 목사는 좋은 말을 해야 하는 데, 이것이 자신의 가정과 삶에 적용되지 않으면, 그 이중성으로 인해 스스로 비참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을 귀하게 여겨야 나도 귀하게 여김을 받는다. 

v. 궁극적인 목표는 기분을 잠시 만족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사물과의 관계:

i. 가장 먼저 충돌하게 되는 문제는 먹는 것. 

ii.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다. 모든 사물이 내게 주신 축복, 선물이신 것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취하라. 먹고, 마시고, 소화하고 배설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감사할만 하다. 모든 것이 축복이다. 시편 24:1 인용. 

iii. 먹고 마시는 문제로 걱정하지 마라. 그러나 문제는 ‘그것은 우상제물이야’라고 한다면, 내 양심으로는 먹을 수 있으나, 양심이 연약한 다른 사람이 문제. ‘예수 믿는 사람이 술 마시냐’라고 한다면 안 마실 수 있는 것이다. 먹는 것이 금하여 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은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양심과 마음을 위하여, 구원과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취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

i. (11:1) 절제의 이유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살며, 자신의 생애를 축복으로 알고 누리면서 살았던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였다. 

ii.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라 되라’ - 하나님께 영광, 이웃에 덕을 끼쳐라. 그리고,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우리의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자유롭게 대하라.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 



말씀에 관한 기본적 원칙과 가치의 출발점은 하나님께 영광, 이웃에 덕을, 만물에 대한 자유, 그리고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내 성품, 행동, 생각이 닮아가는 것.




30일 Tue. 고린도전서 강해(32)




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16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교회 공동체에서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 여성의 위치에 관한 찬반논쟁.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가부장적 시각을 갖고 있지 않는가’하는 비판이 가능하다. 예배드릴 때에 여성은 너울을 쓸 것을 권면하고 있다. ‘머리에 쓰는 것’, 이슬람에서는 여성의 ‘히잡’으로 머리, 얼굴, 가슴을 감추는 모습,  ‘차도르’로 머리에서 발 끝까지 눈만 남기고 몸을 가리는 모습도 있다. 이슬람에서는 여성보호의 취지라고 함. 이는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적인 틀, ‘여성은 남성의 권위 아래에 있어야 한다’. 여성운동이 이슬람에게 영향을 미칠 것. 한국의 카톨릭 여성은 머리에 너울을 쓴다. 한국을 제외하고, 전 세계적으로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미 폐지된 것. 이를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해석하고 즐겨하는 관행이 있다. 너울에는 가부장적인 사고가 배여있다. 



두 가지 창조신학적인 틀

i. 창세 이래 시작되어 주님 앞에 설 때까지 변하지 않은, 바르고 옳은 하나님의 말씀, 틀

ii. 당대의 사회문화적인 상황 속에서 해석할 수 있는 틀: ‘아브라함’을 닮고 싶다.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아내를 여럿 거느리고 싶다’는 것은 잘못된 것. 과거의 관습을 오늘에도 지속시킬 수 없는 것.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꾸리게 하셨고, 이것이 본질이다. 주변적이고 비본질적인 것들은 시대상황 속에서 다르게 표현된 것. 구약으로부터 계시의 내용은 발전해오고 있으며, 계시의 정점은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기의 완전, 온전성이고 궁극적인 모든 것의 표현이다. 구약과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온전한 계시 속에서 결정하고 판단할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창조신학적인 측면에서의 바울의 제안

i. 가부장적인 틀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실 때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었다. 그러나 하와가 범죄를 하고 나서, 하나님의 첫 번째 징계가 ‘너는 남편에게 종속되어야 한다’였는데, 이후에 유대인이 남자 우선권적인 삶을 살았다.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 유대인 남자의 기도문에는 ‘나는 종이 되지 않은 것,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기도 내용이 있었다. 

ii. 남자와 여자의 근본적인 구분이 존재. 여성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가르치지 않고, 이러한 가르침과 배움은 남자의 특권이 됨. 

iii. 이러한 전통이 예수 그리스도 시대 이후로 모두 뒤집어졌다. 예수님은 여성들에게도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여자들에게도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벧전후서,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받을 아내를 사랑하고 보살펴라’.

iv. 바울: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방인’, ‘있는 자/없는 자’, ‘남자/여자’ 차별이 없이 하나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인간의 자유, 인간의 회복. 이를 늘 기억하지 않으면 잘못된 길을 가게 된다.  

v. 공동체에서 남편을 가장으로 세우는 것, 그것은 ‘지배의 원리’가 아니라, ‘섬김과 책임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민, 선택된 백성이 되었을 때에, 독선적이고 독점적인 자기우월권을 주장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그러한 선택은 네가 받은 복을 공동체적으로 나누도록 선택한 것. 선택받았다는 것, 장이 되었다는 것은 의무, 책임, 섬김을 다하라는 것. 

vi. 남편들이 가장의 역할을, 아내와 자녀를 위해 주님이 주신 섬김과 생명을 걸고 사랑하면서 책임을 다하는, 그런 가정은 복을 받는다. 그러나 ‘내가 가장이므로, 너는 내 말에 순종하라, 따르지 않으면 불효자다’라며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권위를 내세우면 그 공동체는 깨지게 되어있다. 하나님도 모든 능력을 갖고 계셨지만, 낮아지셨다. 

vii. (11) 유대 가부장적인 틀, 긴머리는 여성의 특징, 아름다움의 표시. 그러한 아름다움이 공동체 안에 들어왔을 때, 형성된 편견: ‘여성은 남자를 유혹하는 자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남자에게 성적인 매력이 된다’. ‘따라서 여자가 예배 드릴 때에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으면, 예배 공동체의 하나됨에 방해가 된다’. 성적인 매력과 유혹이 공동체의 남성에게 영향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여자가 머리에 너울 등을 착용하지 않고 거리에 나서면 창녀로 오해를 받았다.  이러한 그 당시의 사회문화적인 맥락을 고려할 때, 여성은 교회 공동체에서는 너울을 착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당시에는 너울 미착용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예배의 모습이 아니었다. 유대 전통. ‘주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

viii. (12) ‘여자는 남자로부터, 남자는 여자로부터’ 당대의 유대의 창조신학적 틀, 고린도교회의 여성에 관한 사회문화적 이해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 ‘이웃에게 하나님의 덕을 끼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여성이 너울을 착용하는 문제로 교회 공동체에서 비난과 주장을 주고받는 찬반논쟁을 하며, 공동체가 갈등에 빠지고 파괴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유대공동체의 틀, 사회문화적 관습을 일단은 그대로 수용하되, 교회 공동체에서 궁극적인 목표는 성별의 문제를 뛰어넘는,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새로운 공동체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으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ix. 여성주의자들은 바울의 입장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의 진정한 입장은 ‘시대적인 사회관습의 영향으로 인한 문제로 교회 공동체가 갈등과 논란에 빠져 예배가 방해받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한 혼동을 최소화 하는 방안을 선택하되, 궁극적으로는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존재로 인정되는 공동체를 목표로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현대의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여성이 안수도 받고, 여성장로도 세워지게 되었다. 역사, 문화적인 것들이 개선되어 온 결과. 궁극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자녀된 자다. 창조의 근본적인 질서, ‘본질과 비본질’,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 ‘영원한 것과 당시의 문화적 습관에 제한된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x.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인격자로 인정. 가정과 교회 공동체가 산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덕을 끼치며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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