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15 05:19

그리스도인의 현실인식,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말씀시리즈     설교_김형국 목사

06월 21일_그리스도인과 이념논쟁, 복음이냐 이념이냐
06월 28일_그리스도인의 현실인식.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07월 05일_세상 속에서 새 여행을 시작한 사람들- 세례식

그리스도인의 현실인식,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서론: 많은 사람들이 주일 교회를 찾을 때 갖는 기대


우린 선한 의도와 확신을 갖고 행동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렇게 행동할 경우엔 우리가 기대한 좋은 결과가 아닌 우스꽝스러운, 고통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현실이 어떤지 알지 못하면, 현실인식이 약하면 우리의 선한마음과 확신은 종종 좋은 결과가 아닌,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주일에 교회를 찾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얻을 것을 기대하곤 한다. 살기 힘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신다는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또 많은 이들이 그렇게 고단한 현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듣기 위해 교회를 찾는다고 믿는다.

 

1.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사명


빌립보서 1:9-11 9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10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가)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사명 (10하-11절)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고(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삶이 변화되어야(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한다. 이것은 마태복음 5장의 빛과 소금의 맥락과 동일한 내용이다.

 

마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소금의 짠 맛과 빛의 속성은 곧 착한 행실이고, 이것은 빌립보서 1장의 ‘의의 열매’(삶의 변화)를 뜻한다. 우리는 우리의 착한 행실 = 의의 열매 = 삶의 변화로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나) 사명을 이루기 위한 방법(dynamics, 9-10절상)

이러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이 깨어진 세상을 향한 사랑이 풍성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가능하다. 사랑이 지식과 통찰력으로 풍성하게 되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데 이 분별력을 가져야 우리의 인격과 삶이 변해서(순결하고 흠이 없어, 의의 열매)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다) 지식과 모든 통찰력의 중요성

지식(evpi,gnwsij) - 이 단어는 바울 서신 속에서 15회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여 알아가는 살아있는 지식을 뜻한다. 흔히들 말하는 지식이 아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통찰력/‘총명(ai;sqhsij) - 이 단어는 신약에 1회 사용되었는데 70인역의 용례를 보면,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진 통찰력(insight) 또는 분별력 (discernment)을 뜻한다. 이것은 상황에 대한 지식이다.


지식과 통찰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어떻게 구체적인 삶의 현장/context에서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상황에 대한 지식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사랑, 선한 의도는 곡해되거나 이용될 소지가 많다. 그래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곤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상황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말씀이 그대로 실천되었다. 복음이 강력히 선포될 때 사회를 개혁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들이 일어난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다.

 

2. 역사적인 예들


존 스토트,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IVP)


가) 18세기 영국의 웨슬리의 부흥운동

존 스토트의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란 책을 보면 18세기 영국의 웨슬리의 부흥운동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웨슬리는 당시 영국의 복음전도자로서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회심했다.

 

먼저, 18세기 영국 상황에 대해 그가 쓴 표현을 보자.

“스포츠를 위해 짐승들을 고문하고, 대중이 짐승처럼 곤드레 만드레 되었으며, 아프리카 흑인들을 비인간적으로 매매하고, 동포들을 노예로 수출하고 팔기 위해 유괴하고, 어린이들의 높은 사망률, 보편적인 도박 중독, 감옥제도와 형법제도의 잔인함, 부도덕에 대한 탐닉, 극장의 매춘, 점차 만연해가는 무법천지, 미신과 외설, 정치적 수뢰와 부패, 교회의 교만과 흉포함, 이신론의 피상적인 겉치례, 교회와 정부 안에 만연한 불성실과 품위저하”(Stott 22, 웨슬리 브레디의 글을 인용)

 

이러한 상황에서 웨슬리는 회개하라는 메시지로 부흥운동을 시작한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회적인 대의를 추구하도록 촉구했다. 타락한 세상을 좇지 말고 정의를 행하고 사랑을 베풀라는 메시지였다. 이러한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이후의 복음전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윌리암 윌버포스와 ‘클라팜파’(이 마을에 살던 교구 교회 중심의 정치 세력으로 윌버포스와 함께 노예제를 폐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역사가들은 영국에 프랑스와 같은 피비린내 나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평가한다. 웨슬리의 부흥운동으로 인해 사회적 양심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웨슬리가 복음만 선포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함께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세기 영국은 노예제와 노예무역이 폐지되고, 감옥 제도의 인간화, 공장과 광장의 환경 개선, 가난한 자들의 교육, 노동조합이 생겨나 노동자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변화를 겪게 된다.

 

나) 19세기 미국의 챨스 피니의 부흥운동

19세기 미국의 찰스 피니는 유명한 부흥사로서 많은 이들이 그를 개인적 구원만 선포했던 부흥사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회심과 개혁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교회의 중대한 임무는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교회는 원래 개혁자 집단이 되도록 조직되었다. 기독교를 고백하는 것 자체가 세상의 전반적인 개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고백이며, 사실상 그러한 맹세다” (종교의 부흥에 대한 강의, 23번째 강의)


그의 비서로 일하던 데오도어 웰드는 그의 영향을 받아 반노예제 투쟁에 전 생애를 헌신했다. 이 후 19세기의 왕성한 기독교 선교는 복음 전도와 사회 개혁이 함께 선포되었다.

 

다) 상황에 대해서 무관심해지게 된 역사적인 이유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흐름이 상황에 대한 무관심으로 흘러갔고. 존 스토트는 그의 책에서 이러한 무관심의 다섯 가지 이유를 소개하고 있다.


존 스토트,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IVP) 다섯 가지 이유


1) 신학적 자유주의와의 싸움 (1800년 대 말~1900년대 중엽)

신학적 자유주의는 이성을 중요시하는 풍조로, 권위 있는 믿음을 이성으로,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다시 분석하자는 사조이다. 성경의 기적과 부활,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 등을 부인하고 성경을 조작한 글로 만들었다. 

2) 사회 복음에 대한 반발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는 것,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 곧 복음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을 사회 복음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회 복음에 보수주의자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3)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비관주의

1차 세계 대전 이후 사람들은 인간의 잔학함을 보았고 그래서 사회를 바꿔봤자 소용없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4) 전천년설의 만연

전천년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세상은 점점 악해질 것이라는 설이다. 그렇기에 세상을 개혁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이다.

5) 기독교의 중산층화

원래 기독교는 늘 서민중심이었다.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점점 기독교가 중산층화되었다. 자기 기득권, 현상유지하고 싶어하는 보수성향이 강해졌다. 예리한 사회개혁적 칼날이 사라졌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기독교는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라) 초기 선교 이후의 한국 교회

이러한 흐름 가운데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왔다. 그들은 사회적 책임에 관심이 많았고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그러나 삼일운동 이후 일본과의 정치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조선인의 영혼만 책임지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한국 전쟁 속에서의 이념적 갈등을 겪으며 인권이나 민주화, 노동조합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자의 전유물이라 주장하는 군사독재정권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그들을 지원했다. 사회문제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면 안된다는 인식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70~80년대의 민주화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흐름에 문제를 제기하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40대 후반, 50대 초반의 목회자들이 그러한 세대다.


한국의 이러한 시기 직전, 미국에서는 1966년 Wheaton Decalaration, 1974년 Lausanne 선언이 있었는데, 이 때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에 대한 논의을 정리했고, 복음전도와 사회적, 정치적 참여는 둘 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일부라는 선언이 있었다. 7~80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선언을 공부하며, 복음이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 교회는 로잔선언의 흐름에 속해 있는 교회이다. 이 흐름은 보수교회들도 참여하고자 하지만, 실상 그들은 로잔선언의 내용을 실제로 따라가진 못하고 있다.

 

3. 21세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현실 인식을 위하여...


가) 복음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

그런데 눈에 보이는 사회, 정치 등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갖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축소되곤 한다. 당시 시대 상황에 의해 조종당하고 영향받을 위험성이 있다. 그렇기에 복음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핵심인 것이다.

 

나) 상황에 대한 인식


①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념의 문제

한국 사회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종식된 세계적인 흐름과 무관하게 냉전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존재하는 특별한 상황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는 해방전후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반공주의적이고, 친미적인 성격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대 후반에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이 반공주의가 사회적으로 재검토되고 있고,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성찰에서 빈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된 보수 교회는 반공과 친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 형성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성경적 입장에서 패권주의와 승리주의에 대한 논의, 그리고 종교와 권력과의 관계, 국제 역학의 윤리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② 민족적인 측면에서 ‘통일’의 문제

냉전 이데올로기의 잔해물로서 ‘분단’은 우리 민족에게 멍에와 같은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쇠퇴하고 있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유일하게 그것이 첨예하게 대립되어지는 곳이 한반도라면, 위에서 언급한 한국 개신교의 태생적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증오와 용서치 못하는 민족적 문제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정교 분리라는 허울 아래, 통일에 대한 논의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신학적인 재정립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화해의 복음을 가르치고 행하는 기독교의 근본 메시지에 견주어 이 민족적 과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논의가 깊어져야 한다. 비록 실제적으로 통일을 준비하며 북쪽 동포를 돕는 일에 한국 교회가 선두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와 함께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논의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성경에서는 민족(e;qnoj)을 어떻게 보고 있고, 민족의 화해를 어떻게 다루는지 등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과 연구가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남쪽의 퍼주기식의 지원은 안된다. 모두 군비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며 북한에 대한 지원에 반대한다. 그러나 더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북한에 대한 남한의 지원은 2조원이었지만, 동독에 대한 서독의 지원은 100조원이었다. 통일을 위해선 더 큰 대가지불이 필요하다.


우리의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관심이 없이 개인 구원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들목의 통일비전트립, 통일스터디, 조선족교회를 통한 지원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되고 공부하고 있다는 것은 작지만 자랑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통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공부해야 한다.

 

③ 경제적인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의 문제

신자유주의는 지구촌 전체를 하나의 ‘시장 경제 원리’로 새롭게 통폐합하고 있다.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도 국내에서 논란이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이 경제적 질서를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유방임 경제를 지향하기에 비능률이 해소되고 경쟁시장이 효율적이 되며, 국가 경쟁력이 강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대하는 편에서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인한 빈부격차의 확대, 시장 개방 압력으로 인한 후진국과 선진국의 갈등 등은 낳는 문제를 지적한다. 기복주의적 성향이 강한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물결에 대하여 신학적인 성찰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잘 믿으면 물질의 축복을 받는다’는 메세지에 경도되어 있고, IMF 이후에 양산되기 시작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 등은 외면하고 있는 형편이다.(‘이랜드 사태’는 이 비정규직 문제를 한국 전체 기업과 한국 전체 노조를 대리해서 싸우는 모습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기독교적 기업이 1990년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회적 약자로서의 비정규직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첨예하게 관찰하게 하는 사건이기도하다.) 삶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시스템과 그로 말미암은 결과들에 대하여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성찰이 긴급하게 필요한 때이다.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탐욕, 욕망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 시스템은 반대하지만, 여전히 탐욕적이며 그 시스템의 유익을 누리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쉽게 반대하거나 찬성할 수 없다.

 

④ 문화적인 측면에서 ‘종교 다원주의’의 문제

한국의 문화적 상황은 ‘관용’을 중시하는 종교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절대 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사상과 문화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배타적인 입장은 사회적인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문화적 상황 변화에 둔감한 채, 전근대 (pre-modern)에 행해지던 전도와 선교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때, 그것은 한국 사회 속에서 무례하며 공격적인 모습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종교 다원적 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배타적 진리를 선포하고 살아내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자의 신학적 성찰과 목회자의 목양적 접근이 시급하게 필요한 실정이다.(‘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은 종교다원적 세계 속에서, 더 깊은 성찰과 준비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 교회의 선교와 전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다원적 자세는 일반 개인들의 삶에 있어 도덕적 수준과 삶의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고, 이에 대한 신학적, 목회적 성찰과 대안은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⑤ 교육적 측면에서의 다음 세대에 대한 관심

여러 다른 사회적 이슈들 중에서 목회자와 신학자가 다루어야 할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는 입시 또는 교육과 관련된 부분이다. 한국 사회의 독특한 특징인 ‘입시 현상’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고 있는지,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자기의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세상의 풍조를 성경적 가치관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특별히 학력이 모든 것을 좌우하다시피하는 학력 사회적인 성격을 가진 한국 사회 속에서 우리가 다음 세대를 교육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학적, 목회적인 성찰과 연구, 그리고 대안이 필요하다.(기독교학교연구소, 자료집 “입시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2007))

 

⑥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관심

어느 사회나 그렇듯이, 한국 사회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적 이슈들을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교회는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약에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돌아보고, 그들에 대한 학대에 대해 당신 자신의 백성을 죽이겠다고 경고(출 2:21-24)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라며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눅 10:29-37)도 같은 맥락이다.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성경 신학적 관점에서 불러일으키고, 실제적인 대안을 목양적으로 찾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늘 약자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 여성,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 미성년 사회탈락자..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다.

 

⑦ 전 지구적인 맥락에서의 환경에 대한 관심

서구의 기독교는 창 1:26-27에 대한 오해와, 그 성장과 맥을 같이한 성장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한 비난이 옳건 그르건, 누구보다도 피조 세계의 안위에 관심을 가져야 할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이 환경 문제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가장 낙후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지 한국 사회적인 맥락을 넘어서서 전 지구적인 공동체적 맥락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환경에 대한 목회적이며 신학적인 성찰과 대안을 찾아내어 개개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실제적인 행동과 삶의 방식으로 옮기는 일은 매우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변온동물인 개구리를 삶을 때, 천천히 높아지는 온도에 개구리는 여유있게 적응하며 유유히 헤엄치다 죽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상황이다. 환경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실천하고 있는가. 우리는 괜찮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다음 세대는 어떠한가. “우린 자연을 후세로부터 빌려쓰고 있다.” 빌려쓰고 있는 자연,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소유인 이 자연을 우리의 탐욕과 안락함 때문에 파괴하고 있지 않은가.

 

다) “복음 + 상황 = 의의 열매 = 하나님께 영광”의 오래된 전통 회복

작은 면에서부터 내가 아는만큼 실천하자. 말로 비판하기 보단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 자가용을 타기보단 걷고, 종이컵보단 개인컵을 갖고 다니고, 물과 에너지를 아껴쓰자. 이것들은 우리 아버지의 것들이다.


공부해야 한다. 존 스토트의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읽어라. 아모스서를 묵상하라. 상식 이하로 풍조에 따라 움직이지 말자.


연합과 지원을 통한 사회적 변화를 꿈꾸라. 내가 관심을 가진 영역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단체에 지원하고 함께하라. 삶의 현장에서, 직장에서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함께 할 수도 있다. 그것은 기업차원에서도 비용절감으로 할 것이나, 그것보다도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변화를 실천하라.

 

결론: 그리스도인들의 현실 인식의 궁극적인 목적

그리스도인들의 현실 인식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하늘 아버지께 영광돌리기 위해서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뭔가 다르구나, 역사에 의미있는 일들을 하는구나' 라는 칭찬이 하늘 아버지께 영광으로 올려지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우리끼리만 편하게 잘 사는 걸 원치 않으신다. 불의한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를 하나님은 역겹다고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굳건히 잡고 깨어진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현실을 바로 인식하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행동하길 바란다. 그럴 때 하늘 아버지께서 영광받으실 것이다.

 

 

삶으로 말씀읽기

1.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떤 것이 있는가? 또한 사회적,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이 있는가?

2. 빌립보서 1:9-11을 요약해보라.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선행 조건들이 있어야 가능한가?

3. 나는 오늘날 우리의 상황 속에서 특별히 어떤 부분과 관련하여 세상을 좀 더 바르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4.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교회가 특별히 공통적으로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할 분야가 있다고 도전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1) evpi,gnwsij 바울 서신에 15회 정도 나타난다. 단지 gnw/sij 라고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분분한 해석이 있다 (see O'Brien 76). Bultmann은 이 단어는 동사형과 함께 ‘almost a technical term for the decisive knowledge of God which is implied in conversion to the Christian faith'라고 보았다 (TDNT 1, 707). 이 단어의 구약적 배경인 ‘하나님을 안다,’ 또한 이 단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2) 이 단어는 신약에서는 a hapax legomenon이다. O'Brien은 LXX의 27회 중 22회는 ‘practical understanding which is keenly aware of the circumstances of an action'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It might be translated 'tact' or 'the feeling for the actual situation at the time'” (O'Brien, 77). Silvas는 “discernment - the practical application of knowledge”로 이해했다 (58-59). 이 단어를 영어 성경 번역본들은 judgement (KJV), discernment (NAS), insight (NIV, NRS), understanding (NLT)로 번역했다.

 

(강인철은 그의 책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2006, 중심)에서 한국 개신교가 어떻게 반공주의를 형성하였으며, 2000년 대에 접어들면서, 반공주의의 설득력이 빠르게 감소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달리, 어떻게 개신교 보수주의가 여전한 반공주의를 고수할 수 있는지에 그 역사적, 사회적인 원인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김단일은 “1990년대 개신교 신 교권그룹의 형성과 헤게모니 세력화에 관한 연구” (서울 사회학 석사 논문, 2004)에서, 보수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물적, 인적 자신감과, 개혁적 정권의 집권과 반미친북 정서의 확장을 통한 세계관의 위기 그리고 사회적인 공신력의 하락에 대한 위기감이 현재의 종교 권력화하고 있는 보수 개신교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Trackback 0 Comment 0